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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태아가 사람이라 해도,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 몸을 9개월 동안 강제로 빌려줘야 할 의무까지 자동으로 생기는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톰슨은 낙태 문제를 '태아가 사람이냐'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몸을 쓸 권리가 있느냐'의 문제로 바꿔 보게 했어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내 몸이 낯선 사람과 관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해 볼까요.
알고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콩팥이 망가져 죽어 가고 있었고, 어떤 단체가 내 피만이 그를 살릴 수 있다는 걸 알아내 밤새 내 몸에 그를 연결해 둔 거예요.
내 동의는 전혀 없었고요.
딱 9개월만 이렇게 붙어 있으면 그는 회복해서 떨어져 나갈 수 있어요.
그전에 관을 뽑으면 그는 죽어요.
이게 바로 주디스 자비스 톰슨(Judith Jarvis Thomson, 1929년부터 2020년까지 산 미국 철학자)이 1971년 논문 '낙태의 옹호(A Defense of Abortion)'에서 든 사고실험이에요.
톰슨은 물어요.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사람이고 살 권리가 있는 건 맞아요. 그렇다고 내가 9개월 동안 침대에 묶여 그에게 내 몸을 내줘야 할까요?"
대부분은 "그럴 의무까지는 없다"고 답하죠.
이게 이 논증의 핵심이에요.
낙태 논쟁은 보통 "태아가 사람이냐 아니냐"에서 막혀요.
사람이라면 죽이면 안 되고, 사람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식이죠.
그런데 톰슨은 그 다툼을 아예 건너뛰어요.
"좋아요, 태아가 사람이고 살 권리가 있다고 인정할게요"라고 먼저 양보한 뒤에도, 그것만으로 낙태가 금지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요.
왜냐하면 '살 권리'가 곧 '다른 사람의 몸을 쓸 권리'는 아니거든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살 권리가 있어도, 그 권리가 내 콩팥을 9개월 빌려 쓸 권리까지 주지는 않아요.
마찬가지로 태아에게 생명권이 있어도, 임신한 사람의 몸을 계속 쓸 권리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톰슨의 글은 초점을 태아의 권리에서 임신한 여성의 신체 자율권으로 옮겨 놓았어요.
이 논문이 미국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바로 직전인 1971년에 나왔다는 점도 두고두고 이야기돼요.
두 가지를 조심하면 좋아요.
| 흔한 오해 | 사실 |
|---|---|
| 톰슨은 태아가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오히려 태아가 사람이라고 인정한 뒤에도 낙태가 허용될 수 있다고 했어요 |
| 트롤리 문제를 톰슨이 처음 만들었다 | 원안은 필리파 풋(Philippa Foot)이 먼저 냈고, 톰슨은 이름 붙이고 발전시켰어요 |
또 이 논증이 "낙태는 언제나 옳다"고 말한 것도 아니에요.
몸을 강제로 빌려주는 상황에서 그 연결을 끊는 것이 왜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따진 거지, 모든 경우를 하나로 뭉뚱그린 게 아니에요.
흥미롭게도 낙태에 반대하는 쪽에서도 "이 논문이 논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았다"고 인정하곤 해요.
톰슨의 이야기는 낙태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내 몸을 어디까지 남을 위해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장기 기증, 헌혈, 백신 같은 문제에도 그대로 이어져요.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몸을 내줄 의무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생각, 그게 바로 신체 자율권이에요.
톰슨은 어려운 도덕 문제를 딱딱한 규칙 대신 '내가 그 침대에 누워 있다면?' 하는 생생한 상상으로 풀게 해 줬어요.
톰슨의 바이올리니스트 사고실험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어요.
태아가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해도, 다른 생명을 위해 내 몸을 강제로 9개월 빌려줘야 할 의무는 저절로 생기지 않아요.
살 권리와 남의 몸을 쓸 권리는 다르기 때문이에요.
이 한 편의 논문이 낙태 논쟁의 초점을 태아에서 신체 자율권으로 옮겨 놓았고, 트롤리 문제와 함께 톰슨을 현대 윤리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으로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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