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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우리는 텅 빈 상태에서 '무엇이 좋은가'를 고르는 게 아니에요.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미리 깔려 있는 배경, 곧 '도덕적 지평'이 있어야 그 위에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답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는 선이 보이죠.
그 선을 지평선이라고 해요.
지평선은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테두리예요.
그 안쪽은 보이고, 바깥쪽은 아직 보이지 않아요.
찰스 테일러는 1931년에 태어난 캐나다의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예요.
그는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지평선이 있다고 봤어요.
바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시시한가'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선이죠.
이걸 도덕적 지평이라고 불러요.
우리가 뭔가를 '좋다, 나쁘다, 소중하다'라고 느낄 때, 사실 그 판단은 이미 이 지평 안에서 이뤄지고 있어요.
지평이 없으면 애초에 좋고 나쁨을 가늠할 기준 자체가 없는 셈이에요.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뭐든 내 마음대로 고르면 돼."
그런데 정말 아무 기준 없이 고를 수 있을까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섰다고 해 봐요.
딸기가 좋은지 초코가 좋은지 고르려면, 먼저 '나는 달콤한 게 좋아' 같은 취향이 있어야 하죠.
취향이 아예 없다면 30가지 맛 앞에서 아무것도 못 골라요.
선택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전에 '무엇이 나에게 값진가'가 먼저 서 있어야 해요.
테일러가 말하려던 게 이거예요.
자유롭게 고르는 힘보다, 무엇이 좋은지를 알려주는 배경이 먼저라는 거죠.
좋음(the good)이 지평처럼 깔려 있어야, 그 위에서 내 선택도 뜻을 얻어요.
그래서 그는 '좋음'을 도덕의 가장 밑바닥에 놓았어요.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해!" 멋진 말 같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이상해요.
우리는 태어나서 말도, 이름도, 좋아하는 것도 전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배웠으니까요.
거울을 떠올려 봐요.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을 못 보죠.
마찬가지로 나라는 사람도 다른 사람이라는 거울에 비쳐야 또렷해져요.
친구가 "너 그림 잘 그린다"라고 알아봐 줄 때, 나는 '아,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구나' 하고 나를 알게 돼요.
테일러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 주는 일을 '인정'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을 제대로 인정하느냐 마느냐가 사회의 큰 문제라고 봤죠.
이게 그가 말한 인정의 정치예요.
나의 정체성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남과 주고받는 인정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이에요.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는 신이 정해준다'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아졌죠.
이렇게 종교의 힘이 약해지는 흐름을 세속화라고 해요.
그럼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의미를 아예 안 찾을까요?
아니에요.
오히려 '내 삶은 무엇을 위한 걸까'를 더 애타게 물어요.
테일러는 세속화된 오늘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무언가 소중한 것, 곧 도덕적 지평을 딛고 서야 한다고 봤어요.
지평이 흔들리면 사람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전함에 빠지기 쉽거든요.
현대인의 불안은 바로 이 지평이 옅어진 데서 온다는 거예요.
테일러의 이야기는 세 걸음으로 기억하면 쉬워요.
첫째, 우리는 텅 빈 상태에서 고르는 게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라는 배경, 곧 도덕적 지평 위에서 골라요.
둘째, 그 배경 덕분에 내 선택과 내 정체성이 뜻을 얻고, 그 정체성은 남의 인정을 주고받으며 또렷해져요.
셋째, 신을 덜 믿게 된 오늘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소중한 것을 딛고 서야 하며, 그 딛을 자리가 흔들릴 때 마음이 헛헛해져요.
자유란 '아무거나 고르는 힘'이 아니라 '무엇이 값진지 아는 배경 위에서 고르는 힘'이라는 것, 이 한 문장이 그의 생각을 꿰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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