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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친구에게 "내일 책 빌려줄게"라고 말한 적 있나요?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져요. 당신은 책에 대해 무언가를 설명한 게 아니에요. 그냥 말을 했을 뿐인데, 그 말이 곧 약속이라는 행동이 된 거예요. 말하기 전에는 없던 약속이, 말하고 나니 생겼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보통 우리는 말이 무언가를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하늘이 파랗다"처럼요. 그런데 어떤 말은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무언가를 해버려요. 바로 이 점을 평생 파고든 철학자가 있어요. 영국의 J.L. 오스틴이에요.

J.L. 오스틴은 1911년에 태어나 1960년에 세상을 떠난 영국 옥스퍼드의 철학자예요. 마흔여덟 해라는 짧은 삶이었죠. 그는 거창한 우주의 비밀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보통 말에 주목했어요. 그래서 그가 한 일을 일상언어 철학이라고 불러요.
그의 가장 유명한 강의는 세상을 떠난 뒤 책으로 묶여 나왔는데, 제목이 그대로 핵심이에요. 우리말로 옮기면 말로 일을 하는 방법이거든요. 말이 그냥 소리가 아니라 손이나 발처럼 무언가를 하는 도구라는 거죠.

오스틴은 말을 두 종류로 나눠 봤어요.
하나는 세상을 설명하는 말이에요.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 같은 거죠. 이런 말은 맞거나 틀릴 수 있어요. 고양이가 진짜 거기 있으면 참, 없으면 거짓이에요.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해버리는 말이에요. 결혼식에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는 주례의 말, 배를 띄울 때 "이 배를 무궁화호라 이름 붙입니다"라는 말, "사과할게"라는 말이 그래요. 이런 말은 참도 거짓도 아니에요. 선언하는 순간 정말로 부부가 되고, 이름 붙이는 순간 배 이름이 생기니까요. 말이 곧 사건이에요. 오스틴은 이렇게 무언가를 해내는 말을 따로 떼어 살펴봤어요.

그런데 해버리는 말에는 함정이 있어요. 그냥 입으로 소리 낸다고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길에서 지나가는 두 사람을 붙잡고 "두 분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고 외친다고 해볼까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저는 주례가 아니고, 거기는 결혼식장이 아니고, 두 사람은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오스틴은 이런 조건들을 하나하나 짚어냈어요. 말하는 사람에게 그럴 자격이 있어야 하고, 상황이 맞아야 하고, 진심이 있어야 해요. 이 조건이 어긋나면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헛돌아요. 시동은 걸리는데 바퀴가 안 굴러가는 자동차처럼요. 그는 이런 어긋남을 틀렸다기보다 부적절하다고 봤어요.

오스틴은 한 발 더 나아갔어요. 사실 거의 모든 말에는 행동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말을 할 때 우리는 동시에 세 가지를 한대요.
"방이 춥네요"라고 말한다고 해봐요. 첫째, 방이 춥다는 문장을 그냥 소리 내어 말하는 행동이 있어요. 둘째, 그 말 속에 창문 좀 닫아 달라는 부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요. 셋째, 그 말을 들은 친구가 진짜로 일어나 창문을 닫는 결과까지요.
같은 한마디인데 층이 세 개죠. 그래서 우리는 "춥다"는 한마디로 부탁을 하고, "고마워"라는 한마디로 마음을 전하고, 때론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움직여요. 말은 생각보다 훨씬 바쁜 일꾼이에요.

오스틴 전에는 많은 철학자가 말의 가치를 참이냐 거짓이냐로만 따졌어요. 맞는 말은 좋고 틀린 말은 나쁘다는 식이죠. 그런데 오스틴은 그게 말의 절반밖에 못 본 거라고 알려줬어요.
"약속할게", "미안해", "내가 책임질게" 같은 말은 참이냐 거짓이냐로 잴 수 없어요. 대신 그 말이 제대로 작동했느냐로 봐야 해요. 이 생각은 나중에 언어학과 철학에서 말은 곧 행동이라는 큰 흐름으로 이어졌어요. 우리가 댓글 한 줄, 사과 한마디의 무게를 이야기할 때, 그 뿌리에 오스틴이 있는 셈이에요.

오스틴은 말이 세상을 설명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순간 무언가를 해버린다는 걸 보여줬어요. "약속할게"는 약속을 만들고, 주례의 선언은 부부를 만들죠. 다만 그런 말이 힘을 가지려면 자격과 상황과 진심이라는 조건이 맞아야 하고, 어긋나면 헛돌아요. 다음에 누군가에게 "미안해"라고 말하게 되면, 그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를 하는 거라고 기억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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