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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지하철에서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거의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화면을 넘기고 있어요. 뉴스 한 줄, 친구 사진, 짧은 영상, 또 다른 뉴스 한 줄. 손가락만 까딱하면 세상 소식이 끝도 없이 쏟아져요. 그런데 좀 이상하죠. 그렇게 많은 걸 봤는데도 밤이 되면 "오늘 내가 뭘 봤더라" 하고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어요. 정보는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정작 마음에 남는 건 거의 없어요. 바로 이 묘한 기분을 콕 집어 이야기한 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은 한병철이에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인데, 책도 독일어로 써요.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자주 새 이름을 붙여요. 너무 열심히 잘하려다 스스로 지쳐 버리는 시대를 '피로사회', 모든 걸 다 드러내고 보여 줘야 하는 시대를 '투명사회'라고 불렀죠.
그리고 요즘 시대에는 '인포크라시'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정보를 뜻하는 '인포'에 다스린다는 말을 합친 거예요. 쉽게 말하면 '정보가 임금님 노릇을 하는 세상'이에요. 옛날에는 무서운 임금이나 엄한 규칙이 사람을 눌렀다면, 지금은 끝없이 밀려드는 정보가 우리 마음을 슬그머니 끌고 다닌다는 뜻이에요.

한병철이 가장 중요하게 본 건 '정보'와 '서사'의 차이예요. 서사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그냥 '앞뒤가 이어진 이야기'예요.
이렇게 그려 보세요. 정보는 바닥에 흩뿌려진 색종이 조각 같아요. 하나하나는 반짝이지만 서로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한 조각은 연예인 소식, 옆 조각은 내일 날씨, 그 옆은 게임 광고. 아무리 많이 그러모아도 결국 그냥 색종이 더미일 뿐이에요.
서사는 달라요.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 "옛날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렇게 됐고, 그다음에…" 이렇게 앞과 뒤가 손을 꼭 잡고 이어져요. 그래서 끝까지 듣고 나면 마음에 무언가가 남죠. 레고로 치면 정보는 흩어진 블록이고, 서사는 설명서를 따라 끝까지 쌓아 올린 성이에요. 똑같은 블록이라도 이야기로 엮이는 순간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야기보다 조각에 더 빠질까요? 한병철은 정보를 군것질에 빗대 설명해요.
정보는 과자 같아요. 한 입 먹으면 곧바로 달콤하고, 또 손이 가요. 빠르고 자극적이라 받아들이는 데 힘이 안 들어요. 반대로 서사는 시간을 들여 푹 끓인 국 같아요. 천천히 기다려야 하고 끝까지 먹어야 속이 든든하죠. 화면 속 정보는 1초 만에 다음으로 넘어가지만, 한 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참을성을 요구해요.
문제는 과자만 먹으면 배는 부른데 힘이 안 나듯, 정보만 삼키면 머리는 바쁜데 마음은 헛헛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루 종일 화면을 봤는데도 저녁이면 멍해지는 거죠.

그럼 정보가 많은 게 뭐가 그리 나쁘냐고요? 한병철은 두 가지를 걱정해요.
먼저 나 자신이에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개의 정보 조각을 삼키는데, 조각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서로 이어 붙일 틈이 없어요.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 하루가 어떤 이야기였는지'를 엮기 어려워져요. 내 삶이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흩어진 사진 더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함께 사는 세상도 그래요.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한곳으로 모여요. 그런데 저마다 다른 정보 조각만 손에 들고 화면 속에서 떠들면, 큰 이야기는 없이 목소리만 시끄러워져요. 한병철은 이렇게 이야기가 사라지면 우리가 함께 차분히 결정하는 힘, 곧 민주주의까지 흔들린다고 봤어요.

조금 무겁게 들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한병철의 말은 "스마트폰을 당장 버려라"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색종이 조각을 줍다가 가끔은 멈춰서, 그것들을 이야기로 엮어 보자는 쪽에 가까워요.
친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기, 책 한 권을 천천히 끝까지 읽기,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는 어떤 이야기였지" 하고 돌아보기. 이렇게 앞뒤를 이어 보는 작은 순간들이 흩어진 조각을 한 편의 이야기로 바꿔 줘요. 정보는 검색하면 또 나오지만, 이야기는 내가 이어 줄 때에만 생겨나니까요.

한병철은 지금 우리가 정보가 다스리는 세상, 곧 인포크라시 속에 산다고 말해요. 정보는 색종이 조각처럼 반짝이며 쏟아지지만 서로 이어지지 않아서, 우리는 많이 보고도 멍해지고 내 삶과 세상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기 어려워져요. 이게 그가 말한 '서사의 상실'이에요. 그러니 가끔은 조각을 줍던 손을 멈추고, 앞뒤가 이어진 이야기 하나를 천천히 만들어 보면 좋겠어요. 기억할 건 한 가지예요. 정보는 쌓는 것이고, 이야기는 잇는 것이라는 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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