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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어땠냐고 물으면 가끔 이런 답이 돌아와요. "사진은 500장 찍었는데, 뭘 봤는지 잘 기억이 안 나." 분명 바쁘게 돌아다녔고 시간도 꽉 채웠는데, 막상 마음에 남는 건 별로 없는 거예요. 영화를 두 배속으로 몰아 보고 나서 줄거리가 가물가물한 것도 비슷하죠.
이상하지 않나요? 더 많이 하고 더 빨리 움직였는데 왜 더 텅 빈 느낌이 들까요. 이 질문을 오래 붙잡고 파고든 철학자가 있어요. 바로 한병철이에요.

한병철은 1959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철학자예요. 처음에는 한국에서 금속공학, 그러니까 쇠를 다루는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스무 살 무렵 독일로 건너가 철학으로 길을 완전히 바꿨고, 지금은 독일어로 책을 쓰는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어요.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콕콕 찌르는 책을 여러 권 썼어요. 쉴 새 없이 더 잘하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다 지쳐 버리는 세상을 다룬 '피로사회', 모든 걸 다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을 다룬 '투명사회'가 대표작이에요. 오늘 이야기할 '시간의 향기'는 그중에서도 '시간'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에요.

한병철은 요즘 우리 시간이 마치 실이 끊어진 목걸이 같다고 봐요. 구슬은 그대로 있는데 꿰어 주던 실이 사라진 거죠. 구슬 하나하나는 '오늘 할 일', '다음 약속', '봐야 할 영상'처럼 따로따로 흩어진 점들이에요.
옛날 사람들에게 시간은 이야기처럼 이어져 있었대요. 어제가 오늘로, 오늘이 내일로 흘러가며 하나의 줄거리를 만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 줄거리가 끊기고, 시간이 잘게 부서진 점들로만 남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점을 많이 찍어도, 즉 아무리 많은 일을 해치워도,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으니 마음에 남는 게 없어요.

그럼 왜 하필 '향기'라는 말을 썼을까요. 향기 나는 것들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우려낸 차, 오래 발효시킨 빵, 푹 끓인 국. 전부 시간을 충분히 '머물러' 보낸 것들이에요. 찻잎을 뜨거운 물에 잠깐 담갔다 바로 빼면 향이 안 나잖아요. 가만히 머무는 시간이 있어야 향이 우러나요.
한병철이 말하는 '머무름'이 바로 이거예요. 어떤 일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생각에 충분히 오래 머무는 것. 책 한 권을 천천히 끝까지 읽고, 한 사람 곁에 오래 있고, 한 가지 생각을 며칠씩 곱씹는 일이요. 이렇게 머무를 때 비로소 시간에서 향기가 난다고 그는 말해요. 반대로 머물지 못하고 다음, 또 다음으로만 넘어가면 시간은 향기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려요.

한병철은 그 이유를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에서 찾아요. 요즘은 누구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더 잘하라고 다그치며 살아요. 학생은 더 좋은 성적을, 어른은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고 느끼죠. 그러다 보니 한곳에 가만히 머무는 건 왠지 게으름처럼 느껴지고, 잠시라도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해져요.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말한 게 바로 이거예요.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다 지쳐 버린다고요. 머물 줄 모르게 된 시간은, 이렇게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고 믿는 마음에서 나온 셈이에요.

흔히 우리는 "요즘은 너무 바빠서 탈이야"라고 말해요. 그런데 한병철의 생각은 조금 달라요. 진짜 문제는 빨라진 속도 그 자체가 아니라, 머무는 힘을 잃어버린 거라는 거죠.
생각해 보면 우리는 쉴 때조차 쉬지를 못해요.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자꾸 휴대폰을 켜고, 영상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걸 눌러요. 쉬는 시간마저 또 다른 바쁨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한병철은 잘 쉬고 잘 사는 법이 '더 빨리'가 아니라 '잘 머무는 것'에 있다고 봐요. 멈춰서 한곳에 가만히 있어 보는 능력, 그걸 되찾아야 한다고 말해요.

한병철은 우리 시간이 실 끊어진 목걸이처럼 흩어진 점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마음에 남는 게 없다고 말한 철학자예요. 차가 우러나고 빵이 발효되듯, 무언가에 충분히 머물러야 시간에서 향기가 난다는 거죠. 그러니 다음에 마음이 텅 빈 느낌이 들면, 더 많이 하려 하기보다 한 가지에 가만히 머물러 보세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천천히 머무는 시간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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