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결혼을 위장하고 떠난 최초의 여성 수학 박사
코발레프스카야의 어린 침실은 미적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코발레프스카야가 처음 본 글자는 한글도 알파벳도 아니라 미적분 기호였어요.
1850년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가 살던 시골 저택, 침실을 꾸밀 벽지가 중간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학창 시절 쓰던 노트가 대신 벽에 풀로 붙었어요.
그 노트의 주인은 당대 러시아 수학자 오스트로그라드스키였어요.
빼곡하게 적분 기호와 수식이 담긴 미적분 강의록이었죠.
어린 소피아는 글자도 읽기 전부터 매일 그 기호들을 들여다보며 자랐어요.
외국어 가사도 모른 채 매일 같은 노래를 들으면 어느 순간 멜로디가 몸에 새겨지잖아요.
소피아에게는 미적분이 그 멜로디였어요.
훗날 그녀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어요. "그 벽지가 나를 수학으로 이끌었다."
코발레프스카야는 18살에 가짜 남편을 만들어 러시아를 탈출했다
코발레프스카야는 외국에서 수학을 공부하려고 결혼했어요.
사랑이 아니라 국경을 넘기 위한 행정 절차로.
비자를 받으려고 서류상으로만 결혼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이었죠.
당시 러시아 법은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 없이 해외로 나갈 수 없었어요.
베를린과 파리의 대학들도 여성 입학 자체를 거부했죠.
그래서 1868년, 18살의 소피아는 고생물학자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와 '위장 결혼'을 했어요.
결혼식 다음 해 둘은 함께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떠났고, 이어 베를린으로 향했어요.
처음 몇 년간 둘 사이에 실질적인 부부 관계는 없었어요.
결혼은 오직 그녀의 여권과 이동의 자유를 위한 도구였죠.
독일 수학자 바이어슈트라스는 그녀를 떨어뜨리려 함정 문제를 냈다
바이어슈트라스가 낸 네 문제는 처음부터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만든 핑계였어요.
그는 당시 유럽 최고의 해석학자였어요.
해석학은 미적분의 논리적 토대를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로, 당대 가장 어렵고 엄밀한 영역이었죠.
베를린 대학에 입학을 거절당한 소피아가 직접 그를 찾아오자, 그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기 박사과정 학생들도 어려워하던 문제 네 개를 꺼내들었어요.
"일주일 안에 풀어오면 얘기해보자."
면접관이 지원자를 탈락시키려고 일부러 가장 어려운 문제를 고르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일주일 뒤, 소피아는 네 문제를 모두 풀어서 돌아왔어요.
바이어슈트라스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날부터 그는 4년간 소피아를 사적으로 지도했어요.
1874년, 그녀는 단 한 번의 강의도 정식으로 듣지 못한 채 괴팅겐 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현대 유럽 최초의 여성 수학 박사였죠.
프랑스 학술원은 그녀의 논문 때문에 상금을 두 배로 올렸다
1888년 프랑스 학술원은 한 익명 응모작 때문에 상금 액수를 직접 고쳤어요.
학술원이 '회전하는 강체의 운동'이라는 미해결 수학 문제에 보르댕 상(Prix Bordin)을 걸었어요.
응모 규칙은 익명이었고, 봉투 안에 자신만의 좌우명만 적어 내는 방식이었죠.
심사위원들이 한 응모작을 검토하다가 논의를 멈췄어요.
"이 작업의 수준은 정해진 상금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원래 3,000프랑이었던 상금을 5,000프랑으로 올렸어요.
노벨상 위원회가 어떤 논문이 너무 탁월하다며 상금을 두 배로 올리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프랑스 학술원 역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결정이었죠.
봉투를 열자 안에는 코발레프스카야의 이름이 있었어요.
익명으로 평가받은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수학은 성별 없이 측정됐어요.
다음 해 그녀는 스톡홀름 대학 정교수가 됐어요.
이 또한 현대 유럽에서 여성 최초였죠.
하지만 1891년, 41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녀가 익명이 아니었다면, 심사위원들은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