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금이 아니라 빚이었다, 야프섬 돌부터 닉슨 쇼크까지
태평양 야프 섬은 바다 밑 돌도 돈으로 인정했다
야프 섬 사람들은 바다에 가라앉아 다시는 볼 수 없는 돌도 자기 돈으로 인정했어요.
미크로네시아의 작은 섬 야프에서는 라이(Rai) 돌이라는 화폐를 썼는데, 작은 것은 직경 30cm, 큰 것은 3.6m짜리 거대한 석회암 원반이었어요.
너무 무거워서 옮길 수 없었죠.
그래서 소유권만 이전됐어요.
"이 돌은 이제 네 것이야"라고 마을 전체가 합의하면 그게 곧 거래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운반하던 라이 돌이 바다에 빠져버렸어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돌은 여전히 누구누구의 것이야"라고 합의하고, 바다 밑에 가라앉은 돌을 그대로 화폐로 계속 쓰기로 했어요.
1903년 야프를 직접 방문한 미국 인류학자 윌리엄 헨리 퍼니스 3세가 이 사실을 기록에 남겼어요.
경제학자 케인스와 밀턴 프리드먼도 나중에 같은 사례를 논문에 인용했죠.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야프 섬을 주목한 이유가 있어요.
아무도 본 적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돌이 화폐로 작동한다는 건 화폐의 본질이 물질이 아니라 합의라는 증거거든요.
등기부등본에 적힌 내 아파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사람이 계약서 한 장으로 수억 원을 주고받는 것과 완전히 같은 원리예요.
종이가 곧 소유권이고, 합의가 곧 돈이에요.
영국 의회는 나무 화폐를 태우다 의회까지 함께 태웠다
1834년 영국 의회는 700년 묵은 자기 화폐를 태우려다 의회 건물까지 함께 태웠어요.
12세기부터 영국이 사용한 탤리 스틱(tally stick)은 헤이즐 나뭇가지에 빚의 액수를 칼집으로 새긴 뒤 둘로 쪼개는 방식이었어요.
채권자와 채무자가 한 조각씩 나눠 가졌고, 나중에 두 조각을 맞춰보면 변조 여부를 즉시 알 수 있었죠.
이게 그냥 영수증이 아니었어요.
탤리 스틱은 700년간 영국 왕실 재정의 핵심 도구이자 실질적인 화폐로 기능했어요.
국세청 역할을 하던 기관이 탤리 스틱으로 세금을 걷고 국채를 발행했죠.
빚의 기록이 곧 돈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1834년, 의회가 탤리 스틱 제도를 공식 폐지하면서 쌓여 있던 스틱들을 처리해야 했어요.
결국 웨스트민스터 궁전 지하 화로에 한꺼번에 던져 넣기로 했는데, 너무 많이 태우는 바람에 굴뚝이 과열됐어요.
불이 건물 전체로 번졌고 의회 본관은 그날 밤 거의 전소했어요.
회사 영수증 700년치를 한꺼번에 소각하다가 본사 빌딩이 무너진 사고와 같아요.
빚 그 자체가 700년간 화폐였고, 그것을 처분하는 마지막 순간에 정부 건물을 통째로 삼킨 거예요.
1923년 독일인은 지폐를 난로 땔감으로 썼다
1923년 독일인들은 지폐 다발을 난로에 던져 빵을 굽는 땔감으로 썼어요.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새 정부를 세웠어요.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냈고, 결과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인플레이션이었어요.
1923년 11월,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였어요.
빵 한 덩이가 2천억 마르크였어요.
시민들은 손수레에 돈다발을 가득 실어 빵집으로 갔는데, 가게에 도착하면 가격이 또 올라 있었죠.
결국 돈을 미리 세어 놓을 시간도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마르크 지폐로 벽지를 바르고 난로의 땔감으로 던져 넣었어요.
지폐를 태웠을 때 나오는 열기가 그 종이에 인쇄된 금액의 구매력보다 실질적으로 더 컸거든요.
새로 산 스마트폰이 통화 기능보다 못 박는 망치로 쓸 때 더 유용해진 상황이에요.
화폐가 화폐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화폐라고 믿어야 해요.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지폐는 그냥 종이예요.
바이마르의 마르크는 1923년 11월에 정확히 그 순간을 맞이했어요.
닉슨은 일요일 저녁 한 번에 금본위제를 끝냈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밤, 라디오 연설 한 편이 인류 수천 년의 화폐 시스템을 종료시켰어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황금시간대 연설에서 한 가지를 선언했어요.
달러를 가져오면 정해진 비율로 금으로 바꿔주던 약속, 즉 금 태환을 일방적으로 정지한다고요.
이것이 이른바 닉슨 쇼크예요.
1944년부터 작동해온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날 밤 끝났어요.
브레튼우즈 체제는 달러를 금에 고정시키고 다른 나라 통화를 달러에 묶은 국제 통화 질서예요.
쉽게 말하면 전 세계가 "달러는 금이랑 같다"는 약속 위에서 장사를 하던 시스템이었어요.
그 이후 지구상의 모든 화폐는 어떤 물질로도 뒷받침되지 않게 됐어요.
지금 당신 지갑에 있는 만 원짜리, 달러, 유로, 엔화 전부 정부가 "이게 돈이야"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돈인 거예요.
경제학자 케인스는 이미 1944년에 금을 "야만의 유물"이라고 불렀는데, 닉슨이 그 말을 현실로 만든 셈이에요.
야프 섬의 바다 밑 돌, 700년 된 나무 막대기, 땔감이 된 지폐, 그리고 일요일 밤의 연설.
시대도 장소도 달랐지만 화폐는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어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쓰는 돈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