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디리클레의 침대 머리맡에는 늘 같은 책 한 권이 있었어요. 가우스의 〈정수론 연구〉였어요.
좋아하는 만화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베고 자던 어린 시절, 기억나세요? 디리클레가 딱 그랬어요. 다만 그 책이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교과서였을 뿐이에요.
〈정수론 연구〉는 1801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라틴어로 펴낸 책이에요. 가우스는 당시 수학자들이 "수학의 왕"이라 불렀던 인물로, 이 책에 정수론의 핵심 이론을 몽땅 담아뒀어요. 문제는 라틴어에다 기호 체계가 워낙 독창적이어서, 동시대 수학자들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책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16살의 페터 디리클레는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여행 중에도 챙겼고, 자기 전에도 펼쳤어요. 동시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이 책을 베개 밑에 두고 잠들었다고 해요.
영감의 상징이어서가 아니었어요. 매일 밤 손에 닿는 거리에 두고, 이해할 때까지 다시 펼쳤던 거예요.

200년간 유럽 수학자들이 깨지 못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첫 균열을 낸 사람은 20살의 무명 청년이었어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1637년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가 책 여백에 적어둔 한 줄의 주장이에요. "xⁿ + yⁿ = zⁿ을 만족하는 정수는 n이 3 이상이면 없다"는 명제인데, 증명은 남기지 않았어요. 그 뒤로 200년 가까이 유럽 최고 수학자들이 덤볐지만 아무도 완전히 증명하지 못했어요.
1825년, 파리에 머물던 20살의 디리클레는 이 정리의 n=5인 경우에만 집중했어요. 전체가 아니라 "n이 딱 5일 때만큼은 정수해가 없다"는 것만 증명하는 시도였어요. 그는 절반의 증명을 완성해 파리 학사원에 제출했어요.
그러자 노학자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가 나머지 절반을 메워 함께 발표했어요. 르장드르는 당시 70대의 원로 수학자로, 디리클레 아버지 또래였어요.
대학 신입생이 100년 묵은 미해결 문제의 풀이 절반을 들고 학회에 나타나고, 그 학회 최고 원로가 나머지를 채워준 장면이에요. 하지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자체는 그로부터 170년이 더 지난 1995년, 영국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가 완전히 증명했어요. 디리클레가 첫 균열을 낸 그 문제가 완전히 닫히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디리클레가 장인에게 보낸 아들 출생 소식은 단 다섯 글자였어요. 2+1=3.
1832년 디리클레는 레베카 멘델스존과 결혼했어요. 레베카는 당대 최고 인기 작곡가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의 여동생이었어요. 두 집안의 결합이라 장인은 꽤 명망 있는 인물이었는데, 첫아들이 태어나자 디리클레가 보낸 소식이 바로 "2+1=3"이었어요.
"우리 둘에 하나가 더해졌으니 셋이 됐다"는 뜻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단체 채팅방에 이모지 하나 올리는 것과 비슷해요. 그게 1832년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강의실에서 디리클레는 정반대였어요. 칠판 쪽으로 돌아서서 작은 목소리로 식을 적어나갔고, 학생들 절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따라가지 못했다고 해요.
자기 생각을 한 문장도 또렷이 전달하지 못했던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만큼은 등호 하나로 완벽하게 전달했어요.

디리클레의 강의실에서 절반의 학생은 졸았어요. 그러나 맨 앞줄에는 리만이 앉아 있었어요.
베를린과 괴팅겐에서 디리클레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어요. 그는 칠판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작은 목소리로 식을 적어내려갔고, 설명은 건너뛰기 일쑤였어요. 음질이 최악인 유튜브 강의처럼, 알아서 소화하지 못하면 그냥 뒤처졌어요.
그런데 그 강의실에 베른하르트 리만이 있었어요. 리만은 훗날 복소해석학과 기하학을 뒤흔든 수학자로, 현대 물리학의 토대가 된 리만 기하학을 만든 인물이에요.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고트홀트 아이젠슈타인도 그 강의실에 앉아 있었어요.
데데킨트는 디리클레의 정수론 강의 내용을 받아 적어 책으로 펴냈어요. 그 책은 19세기 정수론의 표준 교과서가 됐어요.
1855년 가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디리클레는 그 자리를 물려받았어요. 괴팅겐 수학교수직, 가우스가 수십 년 동안 지키던 바로 그 자리였어요. 결국 그는 평생 동경하던 가우스의 공식 후계자가 된 거예요.
하지만 4년 뒤인 1859년, 디리클레도 세상을 떠났어요. 가장 흐릿한 강의를 했던 교수의 강의실이 19세기 수학의 산실이 됐고, 디리클레는 자신도 모르게 리만의 가우스가 됐어요. 어쩌면 수학의 불꽃은 명강의보다 집착에서 더 잘 옮겨붙는 건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