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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 하나가 1328년 봄밤, 교황의 도시에서 몰래 도망쳤다.
도망친 사람은 도둑이 아니었다.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논리학자였다.
윌리엄 오컴과 프란체스코회 총장 미카엘 체세나, 동료 둘이서 아비뇽 부두에 배 한 척을 댔다.
교황청이 잠든 새벽, 그들은 론강을 따라 피사로 향했다.
회사 법무팀 조사를 4년째 받던 석학이 어느 새벽 짐을 싸서 경쟁사 회장에게 달아나는 것과 똑같은 그림이다.
교황 요한 22세는 1324년부터 이들을 이단 혐의로 조사하고 있었다.
4년이 지나도 판결은 나지 않았고, 그래서 도망이 선택지가 됐다.
이단 판결은 파문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피사의 부두에서 수도사와 파문당한 황제가 주고받은 한 문장은 14세기 유럽 권력 지형을 바꿔놓았다.
오컴 일행이 피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가 있었다.
그도 교황에게 이미 파문당한 상태였다.
파문이란 교회에서 공식 추방당하는 선언으로, 중세 유럽에서 황제도 파문을 받으면 신하들이 등을 돌릴 명분이 생겼다.
오컴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후대 연대기는 전한다.
"Tu me defendas gladio; ego te defendam calamo."
"당신이 칼로 저를 지키시면, 제가 펜으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파문당한 황제와 이단으로 몰린 수도사가 서로를 지키기로 거래를 맺은 것이다.
오컴은 이후 뮌헨 황실 궁정에서 약 20년간 교황의 세속 권력을 공격하는 논문을 써 내려갔다.
기도 속에 살 법한 수도사가 유럽 최대 권력 싸움의 전속 논객이 됐다.

오컴을 교황과 맞서게 한 첫 질문은 논리학도 형이상학도 아니었다.
예수가 돈지갑을 들고 다녔는가였다.
프란체스코회는 무소유를 서약한 수도회다.
재산을 갖지 않는 것이 그들 정체성의 전부였다.
그런데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교서 하나를 반포하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단"이라고 선언해버렸다.
청빈을 생명으로 여기던 수도사들이 하루아침에 이단으로 몰렸다.
가난을 주장한 쪽이 이단이 되고, 부유한 교황청이 정통이 된 것이다.
환경단체가 "탄소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회장이 "그 말 자체가 허위 주장이니 징계한다"고 선언한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오컴은 1324년 아비뇽으로 소환됐다.
논쟁을 하러 간 게 아니라 심문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결국 그는 도망을 택했다.

면도날의 발명자는 교회에서 추방된 채 죽었지만, 그의 칼날은 600년 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됐다.
우리가 아는 오컴의 면도날은 "불필요한 가정은 쳐내라"는 원리다.
설명이 두 가지라면 더 단순한 쪽을 택하라는 것으로, 오늘날 과학자들이 이론을 세울 때 쓰는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이 표현 자체는 오컴의 저작 어디에도 그 문장 그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컴의 진짜 핵심 주장은 유명론이었다.
'인간 일반'이나 '선함 자체' 같은 추상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존재하는 건 오직 눈앞의 이 사람, 이 행동뿐이라는 것으로, 이 사상은 훗날 루터의 종교개혁과 근대 과학의 경험주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오컴 자신은 1347년 무렵 뮌헨에서 사망했다.
파문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해고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엔지니어의 아이디어가 수십 년 뒤 업계 표준이 되듯이, 교회 밖에서 추방자로 죽은 수도사의 사상이 바로 그 교회를 개혁하는 씨앗이 됐다.
단순함을 평생 외쳤던 사람의 삶이 가장 복잡했다는 것, 어쩌면 그게 오컴의 면도날이 가장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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