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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마당에서, 퇴계를 계승한 학자의 책이 불탔어요.
불을 피운 사람은 적이 아니었어요.
같은 학파, 같은 성리학의 영남 유림이었어요.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경상도 성주에서 태어난 성리학자예요.
퇴계의 사상을 잇겠다며 평생을 바쳤어요.
그 결과물이 『이학종요(理學綜要)』, 성리학의 원리를 집대성한 저술이에요.
도산서원의 유림은 이 책을 "이단서"로 선고하고 서원 마당에서 불태웠어요.
오늘날로 치면 팀 전략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가자고 쓴 문서를, 팀장이 회의실에서 직접 찢어버리는 상황이에요.
그해 이미 세상을 떠난 이진상에게는 반론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왜 같은 편 학자의 책에 불을 질렀는지는 이진상이 평생 무엇을 썼는지를 보면 나와요.

이진상은 양명학을 이단이라 욕하면서, 양명학과 똑같은 결론을 썼어요.
본인은 끝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시 유림은 알아봤어요.
조금 풀어볼게요.
조선 성리학의 기본 틀은 주자(朱子)의 가르침이에요.
주자는 마음(心)을 "이(理, 우주의 원리)와 기(氣, 물질적 에너지)의 합"으로 설명했어요.
퇴계 이황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어요.
마음 안에서 이(理)가 더 근본적이고 중심이라고 강조했어요.
이 관점을 주리론(主理論), '이(理)를 주인으로 두는 논리'라고 해요.
이진상은 퇴계의 이 노선을 극단까지 밀었어요.
"마음의 본질은 오직 이(理)다"라고 단언했어요.
이걸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이치'라고 해요.
이 주장은 왕양명(王陽明)의 학설과 거의 같았어요.
왕양명은 명나라의 유학자로, 조선에서는 정통 주자학을 흔드는 이단으로 취급됐어요.
이진상은 평생 양명학을 맹렬히 비판했지만, 결론만 놓으면 둘이 구분이 안 됐어요.
정통 요리법만 고집했는데 완성된 접시가 금지된 외국 요리와 똑같아 보이는 상황이에요.
영남 유림 입장에서는 이게 용납이 안 됐어요.
퇴계의 이름으로 양명학을 퍼뜨리는 것처럼 보인 거예요.

이진상이 산 68년 동안 조선은 두 번의 양요와 세 번의 정변을 겪었어요.
그는 성주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어요.
벼슬길이 막혀서가 아니에요.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지만 이진상은 모두 사양했어요.
그저 서재에 남아 책을 쓰는 쪽을 택한 거예요.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을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쳐들어왔어요.
오늘날로 치면 외국 군함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 포격한 상황이에요.
이진상은 상소를 올리고 성주로 돌아갔어요.
1882년 구식 군인들의 반란 임오군란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서재에서 『춘추집전』을 편찬했어요.
공자가 엮은 역사서에 주석을 달아 정리하는 작업으로, 수년을 여기에 쏟았어요.
회사가 세 번 합병되고 업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10년 내내, 같은 자리에 앉아 자기 이론서를 마무리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돼요.
이진상에게 성주 서재는 세상에서 도망치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 자리 자체가 전장이었어요.

아버지는 68년을 성주에 앉아 있었고, 아들은 그 아버지의 원칙을 들고 압록강을 건넜어요.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이진상의 아들이에요.
아버지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 성리학자였어요.
이진상의 호 '한주(寒洲)'를 딴 한주학파의 2세대 학자예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어요.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조약이에요.
이승희는 이를 보고 만주 밀산부로 망명했어요.
성리학에는 이런 원칙이 있어요.
나라에 의(義, 올바른 도리)가 무너지면 군자는 그 자리를 떠나 뜻을 지킨다는 거예요.
이승희는 이 원칙을 글자 그대로 실행했어요.
그는 만주에서 한흥동(韓興洞)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고 안중근과도 교류했어요.
평생 책상을 떠나지 않은 아버지의 원칙이, 아들에게선 강을 건너는 발걸음이 됐어요.
도산서원 마당의 불은 책 한 권을 태웠어요.
하지만 이진상의 원칙은 압록강을 건넜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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