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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임금이 무력이나 술수가 아니라 스스로 닦은 도덕과 백성을 아끼는 어진 마음으로 나라를 이끄는 정치예요. 다스리는 사람이 먼저 바른 사람이 되어야 세상이 따라서 바로 선다는 믿음이지요.
한 반에 두 선생님이 있다고 해볼게요.
한 분은 무섭게 소리치고 벌을 줘서 아이들을 억지로 조용히 시켜요.
다른 한 분은 자기가 먼저 약속을 지키고 아이들을 아껴서, 아이들이 저절로 그 선생님을 따르게 만들어요.
조선의 학자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꿈꾼 정치는 바로 두 번째 선생님 같은 나라였어요.
동양의 옛 유학에서는 나라 다스리는 방식을 크게 둘로 나눴어요.
힘과 법으로 억눌러 다스리는 패도(覇道), 그리고 임금의 덕(德)으로 백성을 감화시켜 다스리는 왕도(王道)예요.
왕도정치는 이 가운데 뒤쪽, 즉 "임금이 착하고 어질면 백성도 따라 착해진다"는 생각을 정치의 뿌리로 삼아요.
| 구분 | 패도(覇道) | 왕도(王道) |
|---|---|---|
| 다스리는 힘 | 무력·법·처벌 | 임금의 덕과 어진 마음 |
| 백성의 반응 | 두려워서 따름 | 감화되어 스스로 따름 |
| 목표 | 힘센 나라 | 도덕이 바로 선 나라 |
조광조는 서른네 살이던 1515년,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알성시)에서 정치의 핵심으로 명도(明道)와 근독(謹獨)을 답으로 내놨어요.
명도는 "도를 밝힌다", 근독은 "혼자 있을 때도 늘 삼간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하면 "임금이 바른 이치를 환히 알고, 아무도 안 볼 때조차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거였죠.
이 답이 중종의 마음에 들어 조광조는 벼슬길에 크게 발탁됐어요.
왜 임금 이야기부터 꺼냈을까요?
왕도정치에서는 세상이 잘못된 근본 원인을 맨 위, 곧 임금 자신에게서 찾아요.
물이 위에서부터 맑아야 아래까지 맑듯이, 임금이 성인(聖人)에 가까운 사람이 되면 신하와 백성이 자연히 따라온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조광조는 제도만 손보는 게 아니라 임금을 끊임없이 공부시키고 스스로 모범이 되게 만드는 데 매달렸어요.
말로만 그친 게 아니에요.
조광조는 왕도의 이상을 실제 제도로 밀어붙였어요.
이 밖에 어진 인재를 추천으로 뽑는 현량과(賢良科), 시골 마을의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도 같은 흐름 위에 있어요.
다만 이 둘은 그 자체로 큰 이야기라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게요.
여기서는 "덕과 도의(道義)를 정치의 한가운데에 놓는다"는 왕도의 큰 줄기만 기억하면 돼요.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겨우 몇 년 만에 끝났어요.
1519년 음력 11월, 남곤·심정·홍경주 같은 훈구파 대신들이 조광조 무리가 붕당을 지어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임금에게 고발했고, 조광조는 붙잡혀 결국 사약을 받고 서른일곱 나이에 죽었어요(기묘사화).
궁궐 나뭇잎에 꿀물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고 모함한 일화도 이때 나왔어요.
走(주)와 肖(초)를 합치면 조광조의 성 趙(조)가 되거든요.
왜 무너졌을까요?
왕도정치는 오로지 임금의 신임 하나에 기댔어요.
조광조에게는 군대도 재정도 없었고, 힘의 기반은 임금의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 기관(삼사)뿐이었죠.
그래서 임금의 마음이 돌아서자 순식간에 무너졌어요.
후대의 이황과 이이도 조광조를 아까워하면서도 학문이 채 무르익기 전에 정치에 나서 지나치게 서둘렀다고 아쉬워했어요.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의 속도를 잘못 읽은 셈이에요.
왕도정치는 힘이 아니라 임금의 덕으로 다스린다는 오래된 유교의 이상이에요.
조광조는 이 이상을 조선에 실제로 심으려고, 임금부터 바르게 만들고 잘못된 상을 거두며 바른 도를 세우려 했어요.
그 꿈은 기묘사화로 꺾였지만, "다스리는 사람이 먼저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물음은 오늘 우리가 지도자를 바라볼 때에도 그대로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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