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지치주의는 옛 성인이 다스리던 더할 나위 없는 세상(至治)을 먼 옛날의 전설로 두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도덕으로 갈고닦으면 바로 지금 이 조선에서 그대로 이룰 수 있다고 믿은 조광조의 정치 이상입니다.
시험에서 100점짜리 모범 답안지를 본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볼게요.
한 사람은 "저건 천재만 받는 점수지" 하고 넘깁니다.
다른 사람은 "나도 지금 이 시험에서 저 점수를 받겠다"며 그 자리에서 펜을 고쳐 잡아요.
조광조는 정치에서 두 번째 사람이었어요.
지치주의의 지치(至治)는 '지극할 지'에 '다스릴 치', 곧 더 이상 손댈 데 없이 완벽하게 다스려진 상태를 뜻해요.
옛 중국의 요임금·순임금이 다스리던 태평성대를 가리키죠.
사람들 대부분은 그걸 '옛날이야기'로 두었지만, 조광조는 그 완벽한 정치를 지금 조선에서 실제로 이루자고 밀어붙였어요.
조광조(趙光祖, 1482~1520, 호 정암)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사림파의 영수로, 이 이상을 3년 남짓 실제 정치로 시험하다 서른일곱에 사약을 받고 죽은 인물이에요.
성리학의 밑바탕에는 '사람의 본성은 원래 착하다'는 믿음이 있어요.
누구든 마음을 갈고닦으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조광조는 이 논리를 나라 전체로 넓혔어요.
사람이 착해질 수 있다면, 나라도 완벽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태평성대는 그리워만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 만들어야 할 목표라는 거예요.
출발점은 임금과 신하의 마음이었어요.
조광조는 1515년 알성시 과거 답안에서 정치의 핵심으로 명도(明道)와 근독(謹獨)을 꼽았어요.
명도는 '도를 밝힌다', 근독은 '혼자 있을 때조차 몸가짐을 삼간다'는 뜻이에요.
아무도 안 볼 때도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이 다스려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거죠.
이 답안이 중종의 눈에 들어 벼락출세의 계기가 됐고, 종6품에서 종2품까지 단 3년 만에 오를 만큼 빠르게 중용됐어요.
지치주의는 책상 위 이론이 아니라 곧바로 정책이 됐어요.
조광조에게 개혁이란 '성인의 바른 도에 맞지 않는 것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도덕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거든요.
대표적인 예를 정리하면 이래요.
| 개혁 | 지치주의로 보면 |
|---|---|
| 소격서(昭格署) 혁파 | 하늘·별·산천에 제사 지내던 도교식 국가기관을 없앰. 성인의 도가 아닌 것을 나라에서 지움 |
| 위훈삭제(僞勳削除) | 공도 없이 공신에 오른 이들의 훈적을 삭제(105명 중 76명). 상과 벌을 도덕 기준으로 다시 맞춤 |
| 현량과·향약 | 사람을 학식만이 아닌 인품으로 뽑고, 마을을 자치 규약으로 다스림(각각 다른 이야기라 여기선 이름만) |
하나하나가 '완벽한 다스림'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실천이었어요.
특히 위훈삭제는 살아 있는 권력자들의 이름을 명단에서 지우는 일이라 대단히 위험했지만, 조광조는 원칙이 그렇다면 물러설 수 없다고 봤어요.
지치주의의 힘은 임금의 신임 하나였어요.
사림파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같은 언론 기관은 쥐었지만 군대도 재정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중종의 마음이 돌아서자 순식간에 무너졌어요.
위훈삭제로 이름이 지워진 훈구파 대신들이 반격에 나섰어요.
궁궐 나뭇잎에 꿀물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 써서 벌레가 갉아 먹게 한 뒤 임금에게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요.
走와 肖를 합치면 조광조의 성 趙(조)가 되니,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이었죠.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붙잡혀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어요.
완벽을 향한 정치가 3년 만에 사약으로 끝난 거예요.
실패의 원인은 한쪽으로 단정하기 어려워요.
훈구파의 모함과 중종의 변심을 강조하는 시각도 있지만, 뒷날 이황은 조광조를 두고 자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밀어붙였다고 평했고, 이이도 학문이 무르익기 전에 정치에 나섰다가 몸을 망쳤다고 아쉬워했어요.
이상이 너무 높고 급했다는 지적이죠.
그럼에도 이황은 그를 나라 다스리는 기초를 열어 보인 '사현(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았어요.
지치주의는 '완벽한 정치를 지금 여기서 이룬다'는 조광조의 이상이었어요.
성인의 태평성대를 옛이야기로 두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도덕을 갈고닦으면 당장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죠.
그 믿음이 소격서 혁파와 위훈삭제 같은 과감한 개혁으로 나타났지만, 이상이 높고 걸음이 급했던 만큼 반발도 컸고 결국 기묘사화로 꺾였어요.
지치주의는 조선 선비들에게 '정치는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이상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함께 남겼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