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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무애행은 원효가 깨달은 뒤 절을 나와, 계율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글도 모르는 백성에게 불교를 전한 실천이에요.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하나의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 구절처럼, 신분도 배움도 상관없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원효가 몸으로 보여 준 거예요.
'무애(無礙)'는 '걸림이 없다'는 뜻이에요.
문틈에 낀 옷자락처럼 어딘가 걸려 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물이 바위를 만나도 돌아서 흐르듯 무엇에도 막히지 않는 마음이지요.
원효(元曉, 617년부터 686년까지 산 사람)는 신라의 승려예요.
그가 말년에 보인 삶의 방식을 '무애행'이라고 불러요.
이 이름의 뿌리는 화엄경의 한 구절이에요.
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하나의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원효는 여기서 '무애'라는 말을 따와, 바가지(무애박)를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 〈무애가〉를 지었어요.
걸림 없는 사람이 되면 삶과 죽음의 두려움조차 넘어선다는 뜻을 담은 거예요.
어려운 교리를 외우는 대신, 걸림 없이 사는 사람이 곧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본 셈이죠.
원효는 원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661년, 유학길에 폭풍우를 만나 무덤에서 밤을 지새우다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이 일화는 여러 승전에 실린 것으로,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은 알아 두면 좋아요.)
깨달음 뒤 원효는 유학을 접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낮춰 불렀어요.
'거사'는 출가하지 않은 보통 사람을 가리켜요.
스님이 스스로 거사라 부른 셈이죠.
실제로 그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설총을 낳으며 계율을 벗어났어요(파계).
이때 그가 했다는 말이 이거예요.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어려운 경전을 강의하는 스님이 아니라, 백성과 똑같이 저잣거리를 걷는 한 사람이 되기로 한 거예요.
당시 불교는 주로 왕실과 귀족의 것이었어요.
경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글 모르는 백성에겐 높은 벽이나 다름없었죠.
원효는 이 벽을 노래와 춤으로 넘었어요.
바가지를 악기 삼아 두드리고, 마을을 돌며 〈무애가〉를 부르고 춤추었지요.
마치 오늘날 어려운 이야기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다 같이 따라 부르게 하는 것과 비슷해요.
기존 방식과 원효의 방식을 견주면 이렇게 달라요.
| 구분 | 기존 불교 | 원효의 무애행 |
|---|---|---|
| 장소 | 절과 궁궐 | 저잣거리와 마을 |
| 대상 | 왕실과 귀족 | 이름 없는 백성 |
| 도구 | 한문 경전 | 노래와 춤, 바가지 |
표에서 보이듯, 원효는 불교를 '읽는 것'에서 '함께 부르는 것'으로 바꾼 거예요.
원효의 답은 "그렇다"였어요.
그는 대중에게 정토(淨土) 수행을 널리 가르쳤어요.
어려운 이치를 다 몰라도, 아미타불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면 된다는 것이었죠.
이걸 염불이라고 해요.
아이가 넘어졌을 때 엄마를 부르듯, 마음을 다해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누구나 구원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글자도, 돈도, 높은 신분도 필요 없었어요.
그래서 원효 이후 불교가 신라 백성 사이로 넓게 퍼졌다고 전해져요.
(원효를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하나의 관점일 뿐 학계가 확정한 사실은 아니라는 점은 짚어 둘게요.)
원효의 무애행은 어려운 말 대신 노래와 춤으로, 절 대신 저잣거리에서, 귀족 대신 백성에게 불교를 전한 실천이었어요.
세 가지로 기억하면 좋아요.
첫째, '무애'는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에요.
둘째, 원효는 스스로 거사로 낮추고 백성 속으로 들어갔어요.
셋째, 정토 염불로 글 모르는 사람에게도 길을 열었어요.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하나의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원효는 그 길이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님을, 바가지 하나 두드리며 온몸으로 보여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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