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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승조의 유무불이(有無不二)는 '있다'와 '없다'가 서로 맞서는 두 개의 딴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눈앞의 사물은 임시로 그렇게 보일 뿐 참된 알맹이가 없으니, 있음과 없음은 같은 하나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일 뿐이라는 거예요.
무지개를 떠올려 볼게요.
하늘에 분명히 떠 있으니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가가서 손으로 잡으려 하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없다"고만 하기엔 방금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요.
무지개는 '있다'와 '없다'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 있어요.
승조(僧肇, 384~414)가 말한 유무불이(有無不二)가 바로 이 지점을 가리켜요.
'유(有)'는 있음, '무(無)'는 없음, '불이(不二)'는 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유무불이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등을 돌린 두 편이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보통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고, 딱 잘라 나눠 생각하죠.
승조는 그 칼질이 세상을 잘못 본 거라고 말해요.
무지개처럼 세상 모든 것이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에요.
승조는 후진(後秦) 때 장안에서 활동한 불교 사상가로, 인도 승려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제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혀 '공(空)을 이해함이 제일'이라는 뜻의 해공제일(解空第一) 소리를 들었어요.
그가 붙든 문제가 바로 '공'이었어요.
승조가 보기에 그때 중국 사람들은 두 갈래로 헷갈리고 있었어요.
한쪽은 세상이 진짜로 '있다'고 굳게 믿었고, 다른 한쪽은 결국 다 '없다', 텅 빈 허무라고 여겼어요.
승조는 둘 다 틀렸다고 봤어요.
그래서 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를 내세워요.
왜냐고요?
컵에 담긴 물을 생각해 보세요.
물은 지금 이 순간 컵 모양이지만, 그 모양은 컵이라는 조건 때문에 잠깐 빌린 거예요.
컵이 깨지면 사라지죠.
세상 만물도 이런저런 조건이 모여 잠깐 그 모습으로 있을 뿐, 스스로 버티는 단단한 알맹이는 없어요.
그러니 완전히 '있다'고 못 박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지울 수도 없어요.
있음과 없음이 한 사물 안에서 겹쳐 있는 거예요.
이게 유무불이예요.
유무불이를 "그럼 세상이 다 가짜라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라고 받아들이기 쉬운데, 그건 승조가 가장 경계한 오해예요.
아래처럼 나눠 보면 분명해져요.
| 잘못된 생각 | 유무불이가 말하는 것 |
|---|---|
| 사물은 진짜로 단단히 있다 | 조건 따라 잠깐 있으니 '참으로 있음'은 아니다 |
| 사물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 | 눈앞에 나타나니 '아주 없음'도 아니다 |
| 있음과 없음은 반대말이다 | 한 사물의 두 얼굴이라 둘이 아니다 |
그림자를 예로 들어 볼게요.
그림자는 분명 바닥에 있어요.
밟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림자만 따로 떼어내 상자에 담을 수는 없어요.
빛과 사물이 있어야 생기니까요.
그림자를 두고 "있다"고만 해도, "없다"고만 해도 어긋나요.
딱 이 자리가 유무불이가 서 있는 곳이에요.
세상을 부정해 없애 버리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있음과 없음이라는 두 극단에 붙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예요.
이 오래된 생각은 지금도 쓸모가 있어요.
우리는 무언가를 얻으면 영원히 '내 것으로 있다'고 여기고, 잃으면 '완전히 없어졌다'며 무너지곤 해요.
승조 식으로 보면 얻은 것도 조건이 모여 잠깐 있는 것이고, 잃은 것도 그 조건이 흩어졌을 뿐이에요.
있음에 너무 매달리지도, 없음에 너무 절망하지도 않는 마음의 여백이 유무불이에서 나와요.
집착과 허무 사이에서 흔들릴 때, 무지개나 그림자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 있고, 거기 있지만 붙들 수 없는 것.
그 애매함을 억지로 '있다/없다'로 가르지 않고 그대로 두는 연습이, 승조가 천육백 년 전 건넨 조용한 제안이에요.
승조의 유무불이(有無不二)는 '있다'와 '없다'가 맞서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한 사물의 두 얼굴이라는 가르침이에요.
세상 만물은 조건이 모여 잠깐 있는 것이라, 참으로 있다고도 아주 없다고도 못 박을 수 없어요.
그는 이 자리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라 불렀어요.
무지개와 그림자처럼, 있음과 없음의 극단 어느 쪽에도 붙지 않고 사물을 그대로 보는 눈—그것이 유무불이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한 마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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