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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이제설은 진리를 하나로 보지 않고, 우리가 이름과 말로 주고받는 세속의 진리(속제)와 그 너머 있는 그대로의 궁극의 진리(승의제) 두 겹으로 나눈 가르침이에요. 궁극의 진리는 세속의 말을 사다리처럼 딛고 올라가야 닿을 수 있어서, 두 진리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어요.
친구에게 우리 집을 알려준다고 해 볼게요.
"지하철 3번 출구에서 왼쪽 편의점 끼고 돌면 돼"라고 말하죠.
그런데 '왼쪽'은 친구가 어느 방향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편의점'도 언젠가 문 닫을 가게예요.
그래도 우리는 그 임시적인 말 없이는 친구를 집까지 오게 할 방법이 없어요.
나가르주나(용수, 대략 150년부터 250년경까지 활동한 중관학파의 창시자)가 말한 이제설(二諦說)이 바로 이 이야기예요.
이제설은 진리를 딱 하나로 두지 않아요.
우리가 이름과 말로 주고받는 '세속의 진리'(속제, 俗諦)와, 그 너머에 있는 '궁극의 진리'(승의제, 勝義諦)로 나눠서 봐요.
이 둘을 합쳐 '진속이제(眞俗二諦)'라고 불러요.
중요한 건 이 두 겹이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세속의 말은 틀린 게 아니라, 궁극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거예요.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의 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요.
그는 궁극의 진리란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와 생각의 방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가르칠 수가 없고, 그렇다고 그 궁극의 진리에 닿지 않으면 열반(괴로움이 사라진 자유)에도 이를 수 없다고 말해요.
무슨 뜻일까요.
수영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에게 물의 감각을 말로만 설명한다고 생각해 봐요.
"몸에 힘 빼고 물에 맡겨"라는 말은 물속 감각 그 자체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 말이라도 없으면 물가로 데려갈 수조차 없죠.
세속의 말(속제)은 이렇게 불완전하지만 꼭 필요한 안내판이에요.
그 안내판을 따라가야 진짜 물(승의제)에 몸을 담글 수 있어요.
처음부터 궁극만 붙잡으라고 하면, 딛고 오를 발판이 없어서 아무도 출발조차 못 해요.
여기서 나가르주나의 공(空) 사상이 이제설과 이어져요.
그는 이렇게 적어요.
以有空義故,一切法得成,若無空義者,一切則不成。
'공(空)의 뜻이 있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며, 공의 뜻이 없다면 어떤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공), 오히려 세상의 일들이 굴러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세속의 진리도 헛것이 아니라, 공이라는 궁극의 이치 위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요.
두 진리를 나란히 놓으면 이렇게 정리돼요.
| 구분 | 세속제(俗諦) | 승의제(勝義諦) |
|---|---|---|
| 산스크리트어 | saṃvṛtisatya | paramārtha satya |
| 다루는 것 | 이름·말·약속으로 이뤄진 일상 세계 | 말로 다 담기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 |
| 예 | "이건 컵이야", "저 사람은 철수야" | 고정된 실체 없이 관계로만 있음(공) |
| 역할 | 궁극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 사다리가 가리키는 목적지 |
주의할 점이 있어요.
속제가 '가짜'이고 승의제만 '진짜'인 게 아니에요.
둘 다 진리를 뜻하는 '제(諦)'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컵을 컵이라 부르는 약속이 있어야 물도 마시고 대화도 하죠.
다만 그 컵이 영원히 변치 않는 '컵이라는 실체'를 가진 건 아니라는 걸 아는 것, 그게 승의제예요.
같은 컵을 두고도 두 겹의 눈으로 보는 셈이에요.
이제설의 진짜 매력은 '균형'에 있어요.
사다리를 다 오르면 그 사다리를 발로 차 버리고 싶어질 수 있어요.
"말은 다 허망하니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고 싶어지죠.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허무주의를 딱 잘라 경계했어요.
그는 공(空)을 '아무것도 없음'으로 붙잡는 건, 뱀을 잘못 잡거나 주문을 잘못 외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했어요.
공마저도 또 하나의 실체로 굳혀 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세속의 말과 약속을 통째로 부정해 버리면, 궁극을 가르칠 사다리 자체가 사라져요.
그러면 열반으로 가는 길도 함께 끊겨요.
그래서 이제설은 '둘 다 살려 두기'예요.
세속에서는 컵을 컵이라 부르며 성실히 살고, 동시에 그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잊지 않아요.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자신의 책 『헬골란트』에서 양자역학을 관계로 이해하는 데 나가르주나의 통찰이 도움이 됐다고 밝힌 것도, 이 '관계로 보는 눈' 덕분이에요.
이제설은 진리를 두 겹으로 봐요.
이름과 말로 이뤄진 세속의 진리(속제)와, 말 너머 있는 그대로의 궁극의 진리(승의제)예요.
이 둘은 대결이 아니라 사다리와 목적지의 관계라,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어요.
세속의 말이 있어야 궁극을 가르칠 수 있고, 궁극에 닿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나요.
그러니 나가르주나에게 진리는 '세속을 딛고 궁극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컵을 컵이라 부르며 살되 그 컵을 영원한 실체로 착각하지 않는 두 겹의 시선, 그것만 기억하면 이제설의 핵심을 잡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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