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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이어진 관계 속에서만 잠깐 있을 뿐, 혼자 힘으로 버티는 고정된 알맹이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공이 성립해야 오히려 세상 모든 일이 성립해요.
"공(空)"이라는 글자를 보면 대부분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를 떠올려요.
그런데 나가르주나(龍樹, 대략 150년경부터 250년경까지 활동한 인도 대승불교 승려로 중관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져요)가 말한 공은 정반대에 가까워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혼자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예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 앞에 컵이 하나 있어요.
이 컵은 흙과 물, 만든 사람의 손, 불에 굽는 시간, 그것을 "컵"이라 부르는 우리의 약속이 다 모여서 컵이 됐어요.
이 조건들을 하나씩 빼 보면 컵이라는 것은 남지 않아요.
즉 컵 속에 "컵다움"이라는 딱딱한 알맹이가 따로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어떤 것도 홀로 정해진 알맹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공이에요.
세상 모든 것은 서로 기대어 생겨나요.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했어요.
부모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낮이 있어야 밤이라는 말이 뜻을 가지고, 위가 있어야 아래가 있어요.
"오른쪽"은 "왼쪽"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죠.
어느 하나도 딱 잘라 떼어 놓으면 스스로 서지 못해요.
키를 생각해 볼까요?
내가 큰 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는 옆에 누가 서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농구 선수 옆에서는 작고, 유치원생 옆에서는 커요.
그렇다면 "원래 큰 나"라는 고정된 알맹이는 없는 셈이에요.
크다·작다가 관계에서 생기듯, 모든 성질이 관계에서 잠깐 생겨요.
이렇게 관계 속에서만 있는 것을 나가르주나는 공이라 불렀어요.
그래서 공은 세상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상이 굴러가는 원리를 설명하는 말이에요.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以有空義故,一切法得成,若無空義者,一切則不成 — 공(空)의 뜻이 있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며, 공의 뜻이 없다면 어떤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것이 고정된 알맹이를 가졌다면, 아기는 어른이 될 수 없고 얼음은 물이 될 수 없어요.
변하지 못하니까요.
비어 있기에, 즉 고정된 알맹이가 없기에 오히려 자라고 변하고 배울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아주 조심할 점이 있어요.
공을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로 받아들이면 크게 어긋나요.
"어차피 다 공이니까 아무것도 의미 없어"는 나가르주나의 뜻이 전혀 아니에요.
재미있게도 그는 공마저도 붙잡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공"을 또 하나의 딱딱한 진리로 움켜쥐는 것은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왼 주문"처럼 위험하다고 경고했지요.
뱀을 잘못 잡으면 물리듯, 공이라는 생각조차 실체로 굳혀 버리면 도리어 해가 돼요.
그래서 "공도 공하다(공의 공)"고 말해요.
정리하면 이렇게 나눌 수 있어요.
| 흔한 오해 | 나가르주나의 뜻 |
|---|---|
| 아무것도 없다(허무) | 홀로 존재하는 알맹이가 없다 |
| 세상을 부정한다 | 세상이 변하고 이어지는 원리다 |
| 공은 최종 정답이다 | 공이라는 생각조차 붙잡지 않는다 |
공은 옛날 인도 이야기로 끝나지 않아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건 절대 안 변해"라고 굳게 믿을 때, 공은 잠깐 멈춰 묻게 해요.
그게 정말 고정된 알맹이일까, 아니면 여러 조건이 모여 잠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하고요.
성적이 나쁜 나, 소심한 나도 여러 조건이 만든 지금의 모습일 뿐이에요.
조건이 바뀌면 나도 바뀔 수 있어요.
홀로 정해진 "나"가 없다는 말은 슬픈 말이 아니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기도 해요.
실제로 현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세상 만물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자신의 생각이 나가르주나에게서 힌트를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라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예요.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기대어 생겨나기에, 고정된 알맹이 대신 관계만 있어요.
그래서 공이 성립할 때 오히려 변화도 배움도 세상도 성립해요.
다만 공마저 딱딱한 정답으로 붙잡으면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나가르주나가 남긴 가장 섬세한 당부예요.
무언가를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을 때, 공은 조용히 그 믿음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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