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상상해 보자. 학교 운동회 날이다. 반에서 가장 빠른 친구가 가장 느린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한다. 단, 거북이에게 10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핸디캡을 준다.
"당연히 이기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2400년 전, 그리스의 한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절대 못 이겨." 그 사람이 바로 제논이다.
제논의 논리는 이렇다. 빠른 주자(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우스라고 하자)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까지 달려간다. 그 사이 거북이도 조금 앞으로 간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거북이가 있는 자리까지 달려간다. 그 사이 거북이는 또 조금 앞으로 간다.
이걸 반복하면?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도착할 때마다, 거북이는 항상 조금이라도 앞에 있으니까.
"말도 안 돼!" 맞다. 현실에서는 당연히 추월한다. 그런데 제논의 논리 자체에서 틀린 곳을 찾아보라고 하면?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바로 이 점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부분이다.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 문까지의 거리를 떠올려 보자. 한 4미터쯤 된다고 하자.
문에 도착하려면, 먼저 절반인 2미터 지점을 지나야 한다. 그 전에 1미터 지점을 지나야 한다. 그 전에 50센티미터 지점을. 그 전에 25센티미터를. 그 전에 12.5센티미터를…
이걸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 출발점에서 한 발짝도 못 뗀다. 왜냐하면 어떤 지점에 가려면 그 전에 반드시 그 절반 지점을 먼저 거쳐야 하고, 그 절반의 절반도 먼저 거쳐야 하고… 이게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논의 두 번째 역설, 이분법의 역설이다. 첫 번째 역설이 "따라잡을 수 없다"였다면, 이번에는 아예 "출발조차 할 수 없다"이다. 더 강력하다.
제논에게는 또 다른 역설도 있었다. 날아가는 화살의 역설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어느 한 순간을 딱 포착해 보자. 그 찰나에 화살은 특정 위치에 '있다'. 움직이는 중이 아니라 그냥 거기에 '있다'. 모든 순간이 다 그렇다면, 화살은 언제 움직인 걸까?
사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날아가는 축구공도 사진 속에서는 멈춰 있다. 모든 순간이 정지 사진이라면, 움직임이란 대체 뭘까?
여기서 잠깐. 제논이 정말로 "사람은 걸을 수 없다"고 믿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는 매일 걸어서 시장에 갔을 것이다.
제논에게는 스승이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대담했다. "변화는 환상이다. 진짜 실재는 변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비웃었다. "눈앞에서 물건이 움직이는데 무슨 소리야?"
제논은 스승을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 그 무기가 바로 역설이다. 그의 전략은 이랬다. "좋아, 너희가 운동이 존재한다고? 그럼 운동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논리를 따라가 보자. 어? 모순이 나오네?" 이것을 귀류법이라고 한다.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 뒤, 그 안에서 모순을 찾아 무너뜨리는 논증법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친구가 "나는 거짓말을 절대 안 해"라고 말했다. 당신이 "지난주에 선생님한테 숙제했다고 거짓말했잖아"라고 하면, 친구의 주장은 스스로 무너진다. 제논이 한 게 정확히 이것이다. 다만 상대가 친구가 아니라 '운동이 존재한다'는 상식이었을 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의 역설을 "궤변"이라며 무시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지는 못했다. 역설이 품고 있는 진짜 문제, 즉 무한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다룰 도구가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논의 역설이 정말로 풀린 건 약 2000년이 지나서다. 열쇠는 무한급수라는 수학 도구였다.
피자로 설명해 보자. 피자 한 판이 있다. 먼저 반을 먹는다. 남은 반에서 또 반을 먹는다. 또 남은 것에서 반을 먹는다. 이걸 영원히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
먹은 양을 써보면 이렇다.
1/2 + 1/4 + 1/8 + 1/16 + 1/32 + …
숫자를 끝없이 더하는데, 놀랍게도 이 합은 정확히 1이 된다. 피자 한 판 전체다. 무한히 많은 조각을 더했는데 답이 유한하다. 이것이 무한급수의 핵심이다.
제논의 이분법 역설로 돌아가 보자. 문까지 4미터를 갈 때, 거쳐야 할 거리는 2 + 1 + 0.5 + 0.25 + … 미터다. 무한히 많은 구간이지만, 이 합은 정확히 4미터다. 무한히 많은 단계를 거친다고 해서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다. 각 단계에 걸리는 시간도 함께 줄어들기 때문이다.
17세기,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발명했다. 미적분은 본질적으로 "무한히 작은 것을 다루는 기술"이다. 제논이 던진 질문 — 무한히 잘게 쪼개면 어떻게 되는가? — 에 대한 정밀한 답이었다.
재미있는 건,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도 처음에는 논리적으로 허술했다는 것이다. "무한히 작은 양"이 정확히 뭔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 이 빈틈을 메운 것은 19세기의 수학자 코시와 바이어슈트라스다. 그들은 극한이라는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했다. "한없이 가까워지되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정확한 수학적 언어로 무한의 행동을 기술한 것이다.
제논의 장난은 결국 인류에게 무한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2000년짜리 숙제를 낸 셈이다.
"그래, 수학으로 풀었으니 끝 아냐?" 그렇지 않다.
양자역학에는 양자 제논 효과라는 현상이 있다. 아주 작은 입자를 계속 관찰하면, 입자의 상태 변화가 멈춘다. 마치 제논의 화살처럼 "계속 보고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실험으로 확인된 실제 현상이다. 1977년 물리학자 미스라와 수다르샨이 이론을 제시했고, 이후 여러 실험에서 검증되었다.
컴퓨터 과학에서도 제논의 그림자가 보인다. 프로그램이 어떤 작업을 반복하는데, 반복할 때마다 남은 작업이 절반으로 줄지만 절대 0이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무한루프다. 프로그램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컴퓨터 과학자 앨런 튜링이 증명한 정지 문제 — 프로그램이 끝날지 미리 알 수 있는가? — 역시 제논의 역설과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영화 이야기도 해보자.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총알이 극도로 느려지고, 한 순간 한 순간이 정지 사진처럼 늘어진다. 이것은 제논의 화살 역설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을 무한히 잘게 쪼개면, 모든 것은 멈춰 보인다.
제논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답을 냈기 때문이 아니다. 질문을 냈기 때문이다. "무한이란 무엇인가?" "연속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흐르는가, 아니면 쌓이는가?" 이 질문들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물리학과 수학의 최전선에서 살아 숨 쉰다.
다음에 문 앞까지 걸어갈 때,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지금 무한히 많은 지점을 지나고 있다. 한 발짝 안에 우주가 들어있다. 제논은 그걸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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