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어린이집에 가보면 매일 전쟁입니다.
한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놀고 있으면, 옆에 있던 아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확 빼앗습니다.
뺏긴 아이는 울고, 뺏은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놀기 시작하죠.
이 장면을 보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아직 어려서 그래, 원래 아이들은 착해."
그런데 2300년 전, 이 장면을 보고 정반대로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봐라, 인간은 원래 저렇다. 가르치지 않으면 평생 저러고 산다."
그 사람의 이름은 순자입니다.
중국 전국시대를 살았던 유학자.
공자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같은 유학자인 맹자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했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착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성선설이죠.
순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
이것이 성악설입니다.
같은 장면을 보고 이렇게 다른 결론을 내린 두 사람.
도대체 순자는 왜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순자가 살았던 시대를 먼저 떠올려 봅시다.
전국시대.
이름 그대로, 나라들이 매일 전쟁을 벌이던 시대입니다.
일곱 개의 강대국이 서로를 삼키려 했고, 작은 나라들은 아침에 존재했다가 저녁에 사라졌습니다.
전쟁터에서 한 번에 수만 명이 죽는 일이 일상이었죠.
맹자는 이 혼란을 보며 말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착한데, 나쁜 환경이 그걸 망치고 있는 거야."
마치 깨끗한 물이 더러운 도랑을 만나 흐려지는 것처럼.
그러니 좋은 왕이 나타나서 백성의 착한 마음을 되살려 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순자는 같은 혼란을 보며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잠깐, 정말 사람이 착하다고?
배가 고프면 남의 밥을 빼앗으려 하잖아.
예쁜 것을 보면 갖고 싶어 하잖아.
남이 잘되면 시기하잖아.
이게 바로 본성이야."
순자의 논리는 단순하고 날카로웠습니다.
만약 사람이 원래 착하다면, 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야 할까?
원래 착한 사람에게 "착하게 살아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가르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원래는 착하지 않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이건 꽤 설득력 있는 말이었습니다.
"공부해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아이가 스스로 공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양보해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아이가 저절로 양보하는 경우도 드물죠.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욕망.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원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해지고 싶고, 힘들면 쉬고 싶습니다.
둘째, 이기심.
자기에게 이로운 쪽으로 움직입니다.
이익이 되면 다가가고, 손해가 되면 피합니다.
셋째, 질투.
남이 가진 것을 보면 자기도 갖고 싶어 합니다.
남이 잘되면 기분이 불편해집니다.
이 세 가지를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빼앗고, 속이고, 싸우는 세상이 됩니다.
순자가 보기에, 전국시대가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순자가 아주 어둡고 비관적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나빠" — 이 한마디로 끝나는 철학자.
그런데 순자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나쁘다. 그러나 바꿀 수 있다."
이 '그러나'가 핵심입니다.
순자는 나무를 예로 들었습니다.
산에서 자란 나무는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합니다.
그대로 두면 집도 못 짓고, 활도 못 만듭니다.
하지만 목수가 나무를 자르고, 깎고, 불에 쬐어 구부리면?
반듯한 기둥이 되고, 탄력 있는 활이 됩니다.
나무의 본성은 구불구불한 것이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곧게 만들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순자는 이 과정을 '화성기위'라고 불렀습니다.
한자를 풀면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적인 선함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날것의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교육과 훈련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교육이란 단순히 책을 읽히는 게 아닙니다.
순자가 말한 교육의 핵심은 예(禮)입니다.
예란 뭘까요?
쉽게 말하면 '함께 살기 위한 약속'입니다.
어른에게 인사하는 것.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
밥을 먹을 때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드신 뒤에 먹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예입니다.
순자는 예를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성격이 되고, 성격이 되면 결국 그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양보했던 아이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양보하는 어른이 되는 것처럼요.
그래서 순자는 사실 비관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육에 대한 강력한 낙관론자였습니다.
인간이 원래 나쁘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절실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맹자가 "사람은 착하니까 그 마음을 잘 보존해라"라고 했다면,
순자는 "사람은 나쁘니까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셈이죠.
놀이터를 떠올려 봅시다.
그네가 하나뿐인 놀이터에 아이 열 명이 모여 있습니다.
규칙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힘센 아이가 그네를 독차지합니다.
약한 아이들은 구경만 하죠.
결국 싸움이 나고, 누군가 울며 집에 갑니다.
그런데 "한 사람당 5분씩"이라는 규칙 하나를 정하면?
모든 아이가 순서대로 탈 수 있습니다.
싸움도 없고, 울음도 없습니다.
순자가 본 사회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규칙(禮)이 사람을 바꾼다.
사람들이 질서 있게 사는 이유는 착해서가 아닙니다.
좋은 규칙이 있어서입니다.
교통 신호가 있으니까 사거리에서 양보하는 거지, 모든 운전자가 착해서 양보하는 게 아닌 것처럼요.
순자는 이 생각을 사회 전체로 확장했습니다.
왕이 해야 할 일은 백성의 착한 마음을 믿는 게 아니라, 좋은 제도와 규칙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죠.
이 생각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습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 아주 유명한 두 사람이 있거든요.
하나는 한비자.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법가 사상의 완성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사.
진시황의 재상이 되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스승인 순자가 "인간은 나쁘니까 예와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면,
제자들은 한 발 더 나갔습니다.
"예? 그걸로는 부족하다. 법과 형벌로 강제해야 한다."
순자의 현실적인 인간관이, 역사를 바꾼 정치 사상으로 발전한 겁니다.
물론 순자 본인은 법과 형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규칙의 의미를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죠.
억지로 시키면 눈앞에서만 따르고, 이해하면 평생 따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순자와 법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순자는 끝까지 교육을 믿었고, 법가는 처벌을 믿었습니다.
자, 이제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로 와봅시다.
1960년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자 월터 미셸이 유명한 실험을 합니다.
네 살짜리 아이 앞에 마시멜로 하나를 놓고 말합니다.
"지금 먹어도 돼. 그런데 15분만 참으면 하나 더 줄게."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바로 먹어버렸습니다.
순자가 이 실험을 봤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그것 봐라. 사람은 원래 눈앞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다음입니다.
15분을 참은 아이들은 어떻게 참았을까요?
마시멜로를 안 보려고 눈을 가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즉, 전략을 배운 아이들이 참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건 순자의 말과 정확히 같습니다.
본성은 욕망을 따르지만, 훈련하면 이길 수 있다.
현대 행동경제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리처드 탈러라는 경제학자는 넛지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넛지란 "살짝 찔러주기"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좋은 선택을 하기를 기대하지 말고, 좋은 선택을 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 주라는 거죠.
구내식당에서 샐러드를 눈높이에 놓고 튀김을 구석에 놓으면,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먹게 됩니다.
이것도 순자의 생각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사람의 착한 마음을 믿지 말고, 환경과 제도를 설계하라.
그렇다면 맹자는 틀리고 순자가 맞았을까요?
재미있게도, 현대 과학은 둘 다 맞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공감 능력과 이타심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합니다.
아기도 누군가 우는 걸 보면 따라 울죠.
이건 맹자의 말이 맞습니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공격성도 태어날 때부터 존재합니다.
이건 순자의 말이 맞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이 착한가, 나쁜가"라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만들 것인가?"
착한 면이 자라나도록 도울 것인가, 나쁜 면이 커지도록 방치할 것인가.
2300년 전 순자가 던진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쩌면 순자의 가장 위대한 통찰은 성악설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붙인 한마디였을 겁니다.
"나쁘다. 그러니까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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