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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산타야나가 말한 '본질의 영역(Realm of Essence)'은 시공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로 돌아가는 물리적 세계(존재)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지녔거나 지녔을 법한 모든 성격을 빠짐없이 적어둔 무한하고 영원한 목록이에요. 그래서 아무 힘도 일으키지 못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아요.
도서관에 세상 모든 책의 목록을 적은 카드가 있다고 생각해 볼게요.
카드 자체는 책이 아니라서 무게도 없고, 누구를 밀거나 당기지도 않아요.
그저 '어떤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적어둔 것뿐이죠.
조지 산타야나(1863~1952)가 말한 본질의 영역이 딱 이런 목록이에요.
여기서 본질(essence)은 빨강이라는 색, 둥긂이라는 모양, 3이라는 수처럼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 짓는 성격' 그 자체예요.
산타야나는 이걸 순수한 '구별(distinction)'이라고 불렀어요.
감각에 주어지든, 머릿속 생각으로 떠오르든, 우주 어딘가에 실제로 나타나든 상관없이, 모든 형상이 다 본질이에요.
그래서 본질의 영역은 끝이 없어요.
산타야나는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에요.
없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그가 쓴 '존재(existence)'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로 얽혀 돌아가는 물리적 세계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예요.
돌멩이는 굴러가 유리를 깨죠.
그게 '존재'예요.
그런데 빨강이라는 색 자체는 아무 유리도 깨지 못해요.
본질에는 물리적 힘이 하나도 없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에서 '사물을 만들어내는 힘'을 쏙 빼버린 거예요.
그래서 본질은 존재하지는 않지만 실재(being)해요.
영원하고, 무한하고, 논리적으로 존재보다 앞서죠.
산타야나는 이렇게 못박았어요.
"The realm of essence is not peopled by choice forms or magic powers."
본질의 영역에는 선택받은 형상이나 마법 같은 힘이 사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어서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 사물들이 지닌 온갖 성격들과, 만약 존재했다면 다른 사물들이 지녔을 성격들을 빠짐없이 적어놓은, 무미건조하고 무한한 목록"일 뿐이라고 했어요.
산타야나의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결'이 닮았어요.
둘 다 감각 너머의 형상이죠.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요.
| 구분 | 플라톤 이데아 | 산타야나 본질 |
|---|---|---|
| 지위 | 우주의 참된 원리 | 가치중립적 목록 |
| 위계 | 선의 이데아가 최고 | 위아래가 없음 |
| 도덕 | 도덕적 이상 | 도덕과 무관 |
| 수 | 이상적 소수 | 무한 |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세상을 다스리는 높은 이상이었지만, 산타야나의 본질은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 무한한 목록일 뿐이에요.
스탠퍼드 철학백과는 산타야나가 이렇게 '플라톤주의를 자연화했다'고 표현해요.
그에게는 수학과 논리학도 본질들의 체계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어떤 물리적 존재성도 갖지 않아요.
그럼 이 목록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까요.
산타야나는 직관(intuition)이라고 답해요.
직관은 '이게 진짜 있다'고 믿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본질을 가만히 바라보는(contemplation) 일이에요.
사과가 실제로 있든 없든,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른 '빨강'이라는 성격만은 부정할 수 없죠.
산타야나 철학에는 두 자아가 나와요.
몸을 가지고 행동하며 무언가를 좋아하는 프시케(psyche)와, 냉정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정신(spirit)이에요.
본질을 직관하는 건 바로 이 정신이에요.
재미있는 역설이 하나 있어요.
모든 걸 의심하는 회의주의를 끝까지 밀고 가면, 마지막에 의심할 수 없이 남는 건 지금 눈앞에 떠오른 본질 하나뿐이거든요.
그래서 회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이 도리어 '본질의 발견'으로 이어져요.
물론 이 물리적 세계가 실제로 있다는 믿음은 또 다른 이야기(동물적 신앙)로 이어지지만, 그건 다음 편의 몫이에요.
산타야나의 본질의 영역은 신비한 천국이 아니라, 세상 모든 성격을 적어둔 무한하고 영원한 목록이에요.
본질은 유리를 깨는 돌멩이처럼 '존재(existence)'하지는 않지만, 색이나 수처럼 분명히 '실재(being)'해요.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일상어의 '없다'와 헷갈리지 않는 게 핵심이에요.
플라톤의 이데아를 닮았으되 도덕적 위계는 걷어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에서 힘만 빼낸 이 목록을, 우리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직관으로 만나요.
힘이 하나도 없기에 오히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 그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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