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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를 그냥 참거나 지워야 할 나쁜 감정으로 보지 않았어요. 돈처럼 쌓이고 맡겨졌다가 나중에 크게 쓰이는 '자원'으로 봤죠. 억눌린 분노가 어디로 모여 어떻게 정치를 움직이는지 따지는 것, 그게 그가 말한 '분노의 정치경제'예요.
화가 났는데 그 자리에서 못 터뜨린 적 있나요?
그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어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바로 이 남은 분노에 주목했어요.
개인의 분노도 그런데, 사회 전체에 쌓인 분노는 훨씬 힘이 세거든요.
슬로터다이크는 1947년 6월 26일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난 철학자예요.
2006년에 『분노와 시간: 정치심리학적 시도(Zorn und Zeit)』라는 책을 냈고, 영어판 『Rage and Time』은 2010년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나왔어요.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해요.
분노는 시대마다 어딘가에 쌓였다가, 그걸 관리하고 써먹는 세력에 의해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분노와 시간'은 '분노가 시간을 두고 어떻게 정치의 연료가 되는가'라는 이야기예요.
그 뿌리를 찾아 슬로터다이크는 아주 옛날,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이 이야기의 첫 단어가 바로 '분노'거든요.
여기서 그가 꺼내는 열쇠말이 튀모스(thymos)예요.
튀모스는 우리말로 한 단어로 옮기기 어려워요.
플라톤 이래로 이 말은 기개, 자긍심, 그리고 분노까지 함께 담고 있었어요.
쉽게 말하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마'라고 벌떡 일어서는 마음이에요.
배가 고파서 뭘 갖고 싶은 욕망(에피튀미아)과는 달라요.
튀모스는 자존심이 상했을 때, 정의롭지 못한 걸 봤을 때 끓어오르는 마음이죠.
슬로터다이크는 이걸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생산적인 분노'가 될 수 있다고 봤어요.
여기서 '정치경제'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감이 와요.
경제는 무언가를 모으고, 맡기고, 불려서 쓰는 일이잖아요.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도 꼭 그렇게 움직인다고 봤어요.
혼자 화내면 금방 식어요.
하지만 누군가 흩어진 분노를 한곳에 모아 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사람들이 '저기 가면 내 억울함을 알아준다'고 느끼면, 저마다의 분노를 그곳에 맡기게 돼요.
마치 은행에 돈을 예금하듯이요.
그렇게 모인 분노는 나중에 큰 힘으로 '투자'돼요.
역사 속 여러 운동과 정치 세력이 이렇게 대중의 분노를 모아 자기 연료로 썼다는 거예요.
슬로터다이크는 서양 문명의 밑바닥에 깔린 감정을 원한(르상티망)이라고 봤고, 이 원한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정치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어요.
이걸 그는 '심리정치'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슬로터다이크는 서양에서 이 생산적인 분노가 오래 억눌려 왔다고 봤어요.
두 번에 걸쳐서요.
먼저 기독교예요.
'화내지 말고 참아라, 심판은 나중에 하늘이 한다'는 가르침이 분노를 안으로 눌렀다는 거죠.
그다음은 뜻밖에도 정신분석학이에요.
화가 나는 건 네 마음속 문제이니 치료하라는 식으로, 분노를 개인의 병으로 돌려 버렸다는 거예요.
이렇게 두 번 억눌리면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던 분노가 갈 곳을 잃었다고 슬로터다이크는 진단해요.
그가 23년 전에 쓴 『냉소적 이성 비판』(1983)과도 이어지는 이야기예요.
그 책에서 그는 근대의 냉소주의(Zynismus)를 '계몽된 허위의식', 즉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지친 마음이라고 불렀거든요.
분노마저 식어 버린 이 냉소가 바로 그가 걱정한 현대인의 얼굴이에요.
지금 우리 주변을 봐도 분노는 넘쳐요.
댓글창, 광장, 방송에 화난 목소리가 가득하죠.
슬로터다이크의 눈으로 보면, 문제는 분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에요.
그 분노가 누구에게 모여 어디에 쓰이느냐예요.
분노를 그냥 나쁜 감정이라며 덮으면, 그건 사라지지 않고 엉뚱한 데로 흘러가요.
반대로 누군가 그 분노를 자기 이익을 위해 모으기만 하면 위험해지고요.
그래서 슬로터다이크의 물음은 오늘도 유효해요.
나의 분노, 우리의 분노는 지금 어디에 맡겨져 있을까요?
그가 냉소주의의 옹호자가 아니라 비판자였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해요.
다 알면서 팔짱 끼는 태도가 아니라, 분노를 정직하게 마주 보자는 쪽이었으니까요.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를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쌓이고 맡겨지고 쓰이는 자원으로 봤어요.
옛 그리스말 튀모스는 자존심과 기개와 분노를 함께 담은 말이고, 이 생산적 분노가 기독교와 정신분석학에 의해 두 번 억눌렸다고 그는 진단했죠.
흩어진 분노가 한곳에 모여 '분노 은행'처럼 정치의 연료가 되는 과정, 그게 그가 말한 분노의 정치경제예요.
그러니 오늘 화가 날 때, 그 분노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한 번쯤 되짚어 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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