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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무페는 모두가 하나로 합의한 상태가 아니라, '우리'와 '그들'로 갈라져 서로 맞서는 갈등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살아 있게 만든다고 봤어요. 그 갈등을 없애려 하기보다, 서로를 짓밟지 않고 겨루도록 판을 짜는 것이 민주주의가 할 일이라는 뜻이에요.
반 친구들끼리 소풍 장소를 정한다고 해봐요.
놀이공원파와 바닷가파로 나뉘죠.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두가 한마음이 되기는 어려워요.
벨기에 출신 정치이론가 샹탈 무페(1943년생)는 바로 이 점을 정치의 핵심으로 봤어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늘 '우리'와 '그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무페는 이렇게 편이 갈리는 성질 자체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고 불렀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가 선거·국회·정당 같은 눈에 보이는 제도라면, '정치적인 것'은 그 밑에 깔려 사람들을 편으로 가르는 힘을 가리켜요.
'우리 편'이 생기려면 '우리가 아닌 사람들', 곧 '그들'도 함께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죠.
축구 응원석이 둘로 나뉘어야 경기가 뜨거워지는 것과 비슷해요.
많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목표가 '모두가 납득하는 하나의 결론'이라고 봐요.
충분히 대화하고 이성적으로 따지면 언젠가 합의에 이른다는 거죠.
이런 생각을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고 해요.
존 롤스와 위르겐 하버마스가 대표적이에요.
무페는 여기에 정면으로 반대했어요.
심의민주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죠.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관계는 원래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완전히 동의하는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거든요.
억지로 '이제 다 합의했다'고 선언하면, 거기에 끼지 못한 목소리는 그냥 지워질 뿐이에요.
그래서 무페는 갈등을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증거로 봤어요.
다른 편이 있어야 내 편도 있고, 서로 겨뤄야 정치가 굴러간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서로 미워하며 싸우자는 말은 아니에요.
무페가 내세운 이름은 '아고니즘적 다원주의(agonistic pluralism)'예요.
아고니즘은 옛 그리스에서 경기나 겨룸을 뜻하던 말에서 왔어요.
갈등을 폭력으로 터지게 내버려 두지 말고, 규칙이 있는 겨룸으로 바꿔 놓자는 방향이에요.
그 구분은 그녀의 여러 책에서 더 자세히 다뤄요.
무페의 생각은 혼자 나온 게 아니에요.
그녀는 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1985년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썼어요.
이 책은 그녀의 저작 중 가장 많이 인용돼요.
두 사람은 '에식스 학파'라 불리는 담론분석의 흐름을 만들었고, 좌파 정치를 '급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로 짜려 했어요.
'정치적인 것'이라는 틀은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에게서 빌려 왔어요.
무페는 슈미트의 이 개념을 끌어오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더 튼튼하게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이렇게 다듬은 생각을 『민주주의의 역설』(2000년),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년), 『아고니스틱스』(2013년) 같은 책에서 이어 갔죠.
무페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루뱅, 파리, 에식스에서 공부했고, 하버드와 프린스턴 등에서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교수예요.
무페의 생각은 책 속에만 머물지 않았어요.
그녀는 2018년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사람들의 감정과 편 가르기를 억누르지 말고 좌파 정치의 동력으로 삼자고 했어요.
물론 비판도 있어요.
사회학자 피에르 비른봄은 무페가 유권자의 이성보다 감정에 지나치게 기댄다고 꼬집었어요.
그래도 무페의 물음은 우리 곁에 있어요.
온라인에서 편이 갈려 다투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흔히 "저 갈등을 어떻게 없애지?"라고 물어요.
무페라면 이렇게 되물을 거예요.
"없애는 게 답이 아니라, 서로를 짓밟지 않고 겨루게 하는 게 답 아닐까요?"
무페는 '완전한 합의'라는 이상을 의심했어요.
사람 사는 곳에는 늘 '우리'와 '그들'이 갈리고(이것이 '정치적인 것'이에요), 그 갈등은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라 심장이라는 거예요.
중요한 건 갈등을 지우는 게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몰아 없애려 들지 않도록 규칙 있는 겨룸으로 바꾸는 일이고요.
그래서 그녀는 이 겨룸의 정치를 '아고니즘적 다원주의'라 불렀어요.
다음에 뜨거운 논쟁을 마주할 때, 그 다툼 자체가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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