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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적대는 상대를 없애 버려야 할 '적'으로 보는 관계예요. 경합은 상대가 나와 끝까지 다르더라도 함께 살 자격이 있는 '맞수'로 보는 관계고요. 샹탈 무페는 민주주의의 할 일이 갈등을 지우는 게 아니라, 적대를 경합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봤어요.
샹탈 무페는 1943년에 태어난 벨기에 출신 정치이론가예요.
지금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으로 유명하고, 그 뒤로 『민주주의의 역설』(2000), 『아고니스틱스』(2013) 같은 책을 썼어요.
무페가 평생 붙든 질문은 하나예요.
"사람들 생각이 이렇게 다른데, 민주주의는 그걸 어떻게 다뤄야 할까?"
많은 학자들은 "잘 대화하면 언젠가 모두가 동의하는 답에 이른다"고 답했어요.
무페는 여기에 고개를 저었어요.
갈등은 사라지지 않으니, 없애려 하지 말고 잘 다루자는 거예요.
교실에서 축구팀을 둘로 나눴다고 해볼게요.
상대 팀이 이기면 분해요.
그런데 그 분한 마음에는 두 갈래가 있을 수 있어요.
하나는 이런 마음이에요.
"저 팀은 사라져야 해. 아예 경기장에서 쫓아내고 싶어."
상대를 없애 버릴 '적'으로 보는 마음이죠.
무페는 이걸 적대(antagonism)라고 불렀어요.
적대만 남으면 관계가 전쟁이 돼요.
대화도 규칙도 통하지 않고, 한쪽이 완전히 사라져야 끝나요.
이 생각의 뿌리에는 칼 슈미트라는 학자의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슈미트는 정치의 밑바닥에 늘 '우리 편과 적'을 가르는 선이 있다고 봤어요.
무페는 이 관찰이 날카롭다고 인정했어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정말로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무페는 슈미트에서 한 걸음 더 나가요.
상대 팀을 미워하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저 팀도 같은 학교 학생이야. 같은 리그에서 뛸 자격이 있어. 다음엔 내가 이기고 말겠어."
상대를 없애는 대신, 규칙 안에서 끝까지 겨루는 '맞수'로 보는 거예요.
무페는 이걸 경합(agonism)이라고 불렀어요.
핵심은 이거예요.
적과 맞수는 둘 다 세게 부딪혀요.
미지근하게 화해하는 게 아니에요.
차이는 상대의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느냐에 있어요.
| 무엇을 | 적대(antagonism) | 경합(agonism) |
|---|---|---|
| 상대는 | 없애야 할 적 | 인정하는 맞수 |
| 목표는 | 상대를 제거하기 | 규칙 안에서 이기기 |
| 끝나는 법 | 한쪽이 사라져야 | 계속 겨룸 |
| 결과는 | 전쟁 | 민주주의 |
무페는 민주주의가 하는 일이 바로 이거라고 봤어요.
갈등 자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적을 맞수로 바꾸는 일이에요.
그래서 자기 생각을 '경합적 다원주의(agonistic pluralism)'라고 불렀어요.
여기서 무페는 유명한 학자들과 부딪혀요.
존 롤스나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사람들은 "차분히 이성으로 토론하면 모두가 받아들일 합의에 이른다"고 봤어요.
이런 흐름을 심의민주주의라고 해요.
무페는 반대해요.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답을 억지로 만들면, 거기 끼지 못한 목소리는 어디로 갈까요?
"합의됐으니 넌 틀렸어"라며 밀려나요.
그렇게 억눌린 불만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위험한 적대로 터져 나올 수 있어요.
그래서 무페는 갈등을 지우기보다, 갈등이 안전하게 부딪힐 경기장을 만드는 편이 낫다고 봤어요.
무페의 생각은 한 문장으로 이래요.
갈등은 없앨 수 없으니, 적대를 경합으로 바꾸자.
적은 없애야 할 상대지만, 맞수는 인정하며 겨루는 상대예요.
축구에서 상대 팀을 쫓아내는 대신 다음 경기를 기약하듯,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들이 규칙 안에서 계속 싸울 수 있게 해주는 무대라는 거죠.
완벽한 합의를 꿈꾸기보다, 끝나지 않는 다툼을 잘 견디는 힘.
무페는 바로 거기에 민주주의가 있다고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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