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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박쥐가 초음파로 더듬는 세계처럼, 어떤 존재가 '바로 그 존재로 사는 느낌'은 과학이 뇌를 아무리 낱낱이 뜯어봐도 바깥에서는 붙잡을 수 없어요. 의식에는 오직 당사자만 아는 1인칭 주관이 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볼게요.
박쥐는 눈이 아니라 입에서 초음파를 쏘고, 그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로 어둠 속 세상을 '봅니다'.
그러면 박쥐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그건 '박쥐 흉내를 내는 나'의 느낌이지 진짜 박쥐의 느낌은 아니에요.
미국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1937년생)은 1974년 논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What Is It Like to Be a Bat?)」에서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생물이 의식을 가진다는 건 "there is something that it is like to be that organism", 곧 '그 생물로 존재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 하는 느낌이 있다'는 뜻이에요.
이 느낌이 있으면 의식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죠.
재미있게도 이 질문 자체는 원래 티머시 스프리그가 먼저 던졌고, 네이글이 유명하게 만든 겁니다.
과학은 박쥐의 뇌를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어요.
어떤 신경이 언제 켜지고, 초음파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전부 그림으로 그릴 수 있죠.
그런데 그 완벽한 지도 어디에도 '박쥐가 느끼는 그 세계의 맛'은 적혀 있지 않아요.
비유하자면 이런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친구에게 빨강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파장이 몇이고 어떤 세포가 반응하는지 다 알려줘도, 그 친구가 '빨강을 본 느낌'을 갖게 되진 않아요.
설명은 바깥에서 하는 3인칭 이야기고, 느낌은 안에서 겪는 1인칭 사건이니까요.
네이글은 이 둘 사이의 틈을 '의식의 환원 불가능한 주관성'이라고 불렀어요.
그는 뒷날 이 논문이 "주관성이 심신 문제의 여러 해법에 걸림돌이 된다"는 걸 보이려 한 거라고 밝혔습니다.
네이글은 1986년 책 『The View from Nowhere(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본 풍경)』에서 이 생각을 더 넓혔어요.
과학이 하는 일은 자꾸만 '나'라는 특정 자리를 지워서, 누가 봐도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이걸 객관성이라고 하죠.
아래 표처럼 두 관점은 성격이 달라요.
| 관점 | 누구의 것 | 잘하는 일 |
|---|---|---|
| 객관적 3인칭 | 누구에게나 같음 | 뇌·물질·법칙 설명 |
| 주관적 1인칭 | 오직 당사자 | 겪는 느낌 그 자체 |
문제는, 자리를 지울수록 정확해지는데 정작 '느낌'은 특정한 자리에서만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 자리도 아닌 완벽한 객관의 시선에 서면, 세상은 잘 보이는데 '느낌'만 쏙 빠져 버려요.
네이글은 이 빠진 조각을 억지로 없는 셈 치지 말고 진지하게 남겨 두자고 한 거예요.
여기서 흔한 오해가 하나 있어요.
'아, 그럼 마음은 물질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옛날 이원론 얘기구나' 하고 넘겨짚는 거예요.
그런데 자료는 이걸 분명한 오독이라고 짚습니다.
네이글의 진짜 논점은 '세계 어딘가에 유령 같은 마음이 따로 떠 있다'가 아니에요.
어떤 느낌을 제대로 개념으로 가지려면 그 느낌을 직접 겪어 봐야 한다는, 우리 앎의 조건에 관한 이야기예요.
박쥐의 초음파 감각을 나는 겪어 본 적이 없으니 그 개념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거죠.
세계가 둘로 쪼개졌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앎에는 '직접 겪음'이라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겸손한 지적입니다.
네이글의 박쥐 논증은 딱 한 가지를 붙잡아요.
어떤 존재로 '사는 느낌'은 그 당사자에게만 열려 있어서, 아무리 완벽한 객관적 설명으로도 남김없이 옮겨 담을 수 없다는 거예요.
과학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과학이 자리를 지우는 방식으로는 놓치는 조각이 있다는 말이에요.
빨강을 본 느낌, 박쥐로 어둠을 더듬는 느낌처럼요.
다음에 누군가 '느낌도 결국 뇌일 뿐'이라고 말하면, 박쥐 한 마리를 떠올려 보세요.
그 작은 물음 하나가 아직 풀리지 않고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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