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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관용 원리는 어떤 논리나 언어 체계도 미리 정해진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서, 규칙을 분명히 밝히기만 하면 누구나 자기 방식의 언어를 자유롭게 만들어 써도 된다는 카르납의 원칙이에요.

1934년, 독일어로 쓴 책 한 권에서 루돌프 카르납은 깜짝 놀랄 문장을 적어요. ‘논리학에는 도덕이 없다.’ 논리라고 하면 보통 가장 엄격하고 한 치도 양보 없는 분야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카르납은 거기에 ‘옳은 하나’ 같은 건 없다고 말한 거예요. 이 한 문장에 그가 평생 밀고 간 생각, 바로 관용 원리가 담겨 있어요. 이 글에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왜 그게 똑똑한 생각이었는지 천천히 풀어 볼게요.

친구들과 새 보드게임을 한다고 해 봐요. 주사위가 6이 나오면 한 번 더 던질지, 말을 잡으면 처음으로 돌려보낼지, 이런 건 시작 전에 정하기 나름이에요. 어떤 규칙이 ‘우주의 진짜 규칙’이라서 따라야 하는 게 아니에요. 다들 같은 규칙에 합의하고, 그 규칙을 분명히 말해 두기만 하면 게임은 잘 굴러가요.
카르납은 언어와 논리도 딱 이렇다고 봤어요. 우리가 쓰는 말, 수학 기호, 논리 규칙은 세상이 정해 준 정답이 아니라 우리가 고른 규칙이라는 거예요. 길이를 잴 때 미터를 써도 되고 자를 써도 되는 것처럼요. 그러니 ‘어떤 논리가 진짜 맞는 논리냐’를 두고 싸우지 말고, 그냥 ‘나는 이런 규칙으로 말하겠다’고 분명히 밝히고 쓰면 된다는 거죠. 조건은 하나예요. 규칙을 숨기지 말고 또렷하게 적어 둘 것.

카르납은 혼자가 아니었어요. 1920년대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토론하던 학자들 모임, 빈 학파의 대표 인물이었죠. 이들은 한 가지 고민을 공유했어요. 철학자들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거창한 말을 수백 년 동안 해 왔는데, 정작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이들이 든 기준이 검증 원리예요. 어떤 문장이 뜻을 가지려면,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 경험으로 확인할 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이 잣대를 대면 ‘절대정신이 역사를 움직인다’ 같은 형이상학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닌, 그냥 확인 불가능한 말로 분류돼요. 카르납은 이런 문제가 사실 ‘세상’에 대한 다툼이 아니라 ‘말을 어떻게 쓸 거냐’에 대한 다툼이라고 봤어요. 그러니 답은 안개 속을 더 헤매는 게 아니라, 언어의 규칙을 또렷이 정리하는 일이었던 거예요.

왜 하필 이름이 관용 원리일까요. 관용은 ‘네 방식도 인정한다’는 태도잖아요. 카르납은 ‘내 논리가 유일하게 옳다’며 서로 우기는 철학 싸움을, 규칙을 밝히는 문제로 바꿔 버렸어요. 네가 그런 규칙의 언어를 쓰겠다면 그것도 좋다, 단 규칙을 분명히 말해라, 그러면 우리는 헛도는 말다툼 대신 진짜 따져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거죠.
이건 ‘아무 말이나 다 맞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예요. 규칙을 또렷이 깔아 두면, 그 규칙 안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가 더 깐깐하게 가려져요. 자유롭게 언어를 고르되 일단 골랐으면 책임지고 그 규칙을 지키라는, 느슨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격한 약속인 셈이에요.

카르납의 관용 원리는 세 마디로 기억하면 돼요. 첫째, 논리와 언어에는 미리 정해진 단 하나의 정답이 없어요. 둘째, 그러니 어떤 규칙의 언어를 쓸지는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요. 셋째, 대신 그 규칙을 또렷하게 밝혀야 해요. 보드게임 규칙을 시작 전에 합의하듯이요. 답 없는 형이상학 논쟁에 지쳐 있던 그는, 다툼의 무대를 ‘무엇이 진짜냐’에서 ‘우리가 말을 어떻게 쓰기로 했느냐’로 옮겨 놓았어요. 관용이라는 부드러운 이름 뒤에, 생각을 또렷하게 만들려는 단단한 마음이 숨어 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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