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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옛날 어느 마을에 큰 광장이 하나 있다고 해 봐요. 누구든 와서 "세금을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이 규칙은 바꾸자" 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사람들이 차분히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우리 마을은 이렇게 하자"는 생각이 저절로 모여요.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는 진짜로 이런 공간이 있었다고 봤어요. 18세기 유럽의 커피하우스, 살롱, 신문 같은 곳이요. 그 시절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사람들이 신문을 소리 내어 읽고, 방금 읽은 소식을 두고 옆 사람과 열을 올리며 토론했대요. 신분이나 재산은 잠시 내려놓고, 오직 더 나은 논리로만 서로를 설득하면서 '여론'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겨루는 자리를 '공론장'이라고 불러요. 듣기만 해도 멋지죠.

여기서 미국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손을 들어요. 1947년에 태어나 지금도 뉴욕에서 가르치는 비판이론가예요. 프레이저는 1990년에 쓴 글에서 이렇게 물어요. "그 멋진 커피하우스에, 정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나요?"
사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대부분 돈 있고 교육받은 남자들이었어요. 여자는 아예 들어갈 수 없었고,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노동자에겐 토론할 시간도 자리도 없었어요. 그래서 프레이저는 이걸 '모두의 공론장'이 아니라 사실은 '부르주아 공론장', 곧 잘사는 사람들의 광장이었다고 불러요. '모두의 광장'이라더니, 실제로는 일부만 들어가는 광장이었던 거예요.

공론장에는 중요한 약속이 하나 있었어요. "들어올 때는 네가 부자든 가난하든 다 내려놓고, 평등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는 거였죠.
좋은 말 같지만, 교실을 떠올려 봐요. 선생님이 "여기선 다 평등하니 똑같이 발표해"라고 말해도, 평소 목소리 큰 아이가 계속 말을 가로채면 조용한 아이는 끝내 입을 못 떼요. 차이를 없는 척한다고 차이가 사라지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미 힘 있는 사람이 그 힘을 계속 쓰면서도,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게 만들죠.
프레이저는 바로 이 지점을 콕 집었어요. 불평등을 '잠시 접어두자'는 규칙은 불평등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가려서 안 보이게 할 뿐이라고요. 그래서 약자는 똑같이 한 표를 가진 것 같아도, 정작 자기 이야기를 꺼낼 자리는 못 얻는 거예요.

큰 광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가만있지 않았어요. 자기들끼리 모이는 작은 광장을 따로 만들었죠. 여성들의 독서 모임, 노동자들의 조합, 자기들만의 잡지와 서점 같은 곳이요. 프레이저는 이런 곳을 '하위 대항 공중'이라고 불렀어요. 이름은 어렵지만, 한마디로 '아직 목소리를 못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기 말을 벼리는 자리'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런 작은 광장에서 처음으로 새 단어가 태어나거든요. 예를 들어 '성희롱'이라는 말이 그래요. 예전엔 직장에서 겪는 불쾌한 일에 마땅한 이름조차 없어서, 그냥 참거나 "내가 예민한가" 하고 넘겼어요. 그런데 여성들이 따로 모여 이야기하다 보니 "이건 참을 일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야"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죠. 그 말이 점점 큰 광장으로 퍼져 나가, 이제는 누구나 아는 말이 된 거예요.

프레이저가 공론장을 '다시 읽자'고 한 결론은 이거예요. 건강한 민주주의는 모두가 둘러앉는 단 하나의 토론 식탁이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식탁이 함께 있는 모습이라는 거예요. 서로 부딪치고 경쟁하는 식탁이라도 괜찮아요. 오히려 그래야 밀려났던 목소리가 자랄 자리가 생기니까요.
그리고 진짜 평등한 토론을 원한다면, 불평등을 못 본 척 접어둘 게 아니라 "지금 누가 불리한 자리에 있지?" 하고 먼저 살펴야 한다고 말해요. 이 고민은 프레이저가 평생 파고든 더 큰 이야기, 곧 가진 것을 어떻게 나눌지(재분배)와 서로를 어떻게 동등하게 대접할지(인정)라는 정의 문제로도 이어져요.

하버마스는 누구나 평등하게 토론하는 멋진 공론장을 그렸어요. 프레이저는 그 그림에서 빠진 사람들, 곧 여자와 노동자처럼 광장 밖에 서 있던 이들을 가리켰죠. "다 평등하다"는 약속은 차이를 지우는 대신 가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밀려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작은 광장에서 새 목소리를 길러 큰 광장으로 보낸다는 것. 다음에 "우리 모두의 의견"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 번쯤 물어보면 좋겠어요. 그 '모두' 안에 정말 모두가 들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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