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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친구를 기다린 적 있나요? 수백 명이 지나가는데, 우리는 그 많은 얼굴 중에서 딱 한 명을 골라 "어, 왔다!" 하고 손을 흔들어요.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만나도, 머리 모양이 바뀌고 옷이 달라도 "같은 그 친구"라고 바로 알아봐요.
너무 당연해서 신기할 것도 없어 보이죠. 그런데 영국 철학자 피터 스트로슨(1919년부터 2006년까지 살았어요)은 바로 이 흔한 일 앞에서 멈춰 섰어요. 우리가 세상의 무언가를 콕 집어 가리키고, 시간이 지나도 "같은 것"이라고 알아보는 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를 평생을 두고 따져 물었죠.

스트로슨은 1959년에 펴낸 '개체들'이라는 책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요. "우리가 말로 가리킬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뭘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별별 걸 다 입에 올려요. 사과, 슬픔, 7이라는 숫자, 어제 꾼 꿈. 그런데 이 중 어떤 건 다른 것에 기대야만 말이 돼요. '슬픔'은 슬퍼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미소'는 웃는 얼굴이 있어야 하죠.
반대로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혼자 딱 서 있는 것들이 있어요. 돌멩이, 나무, 책상, 그리고 사람.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이에요. 스트로슨은 이런 것들을 '기본 개체'라고 불렀어요. 다른 모든 이야기가 결국 이것들 위에 얹히는, 말하자면 세상이라는 건물의 1층 바닥 같은 거예요.

그럼 '동일성'은 뭘까요. 어려운 말 같지만, 아까 친구를 일주일 뒤 다시 알아본 그 일이에요. 어제의 그것과 오늘의 이것이 '같은 하나'라고 말하는 거죠.
스트로슨은 이게 가능한 이유를 이렇게 봤어요. 우리 머릿속엔 세상 전체를 담는 하나의 커다란 지도가 있다고요. 모든 물체는 이 지도 위 어딘가, 어떤 시각에 자리를 차지해요. 그래서 "어제 이 자리에 있던 그 컵"과 "지금 여기 있는 컵"을 같은 자리, 같은 흐름으로 이어 붙여 "같은 컵"이라 말할 수 있어요.
만약 이런 공통의 지도가 없다면요? 내가 본 것과 당신이 본 것이 같은 것인지 영영 맞춰 볼 수가 없어요. 같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지도가 있어서, 우리는 비로소 "그거 말이야, 그거!" 하고 통할 수 있는 거예요.

스트로슨은 재미있는 상상도 해 봐요. 눈도 손도 없이 오직 소리만 들리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면 어떨까요? 거기서도 "아까 그 소리가 지금 또 들린다"고,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상상이 중요한 건, 우리가 '같은 것'을 알아볼 때 공간이 얼마나 깊이 깔려 있는지 드러내 주기 때문이에요. 소리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흘러가 버려서, 한번 사라진 소리가 '돌아왔다'고 말하기가 참 애매해요. 스트로슨은 이 머릿속 실험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다시 알아보는 능력이 사실은 '공간 속 자리'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를 비춰 봤어요.

물체만 기본 개체라면 이야기가 단순했을 텐데, 스트로슨은 '사람'을 따로 콕 집어요. 사람은 좀 이상한 존재거든요.
사람한테는 키와 몸무게처럼 만질 수 있는 면이 있어요. 동시에 기쁨이나 생각처럼 만질 수 없는 면도 있죠. 옛날 철학자들은 이걸 '몸'과 '마음' 둘로 쪼개 설명하려 했어요. 그런데 스트로슨은 그렇게 쪼개면 오히려 더 꼬인다고 봤어요. '철수가 아프다'와 '철수가 키가 크다'는 똑같이 한 사람 철수에 대한 말이잖아요.
그래서 그는 '사람'을 더 쪼갤 수 없는 하나의 기본 개체로 두자고 해요. 몸이 먼저고 마음이 나중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둘 다 가진 '사람'이 통째로 출발점이라는 거죠.

여기서 스트로슨이 특별했던 점이 있어요. 많은 철학자가 "세상은 사실 이래야 한다"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했어요. 스트로슨은 반대였어요. 그는 우리가 이미 쓰고 있는 생각의 틀을 있는 그대로 그려 보이려 했죠.
그는 이걸 '묘사하는 형이상학'이라고 불렀어요. 없던 세상을 발명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무심코 쓰는 생각의 뼈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이에요. 친구를 알아보고, 컵을 다시 찾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그 평범한 능력 안에 이미 형이상학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스트로슨은 우리가 날마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에서 출발했어요. 무언가를 콕 집어 가리키고, 시간이 지나도 같은 것이라 알아보는 일이요. 그 바탕에는 돌이나 사람처럼 혼자 설 수 있는 '기본 개체'가 있고, 모두가 함께 쓰는 하나의 공간과 시간 지도가 있어서 '같은 것'이라는 말이 통해요. 그리고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쪼개지지 않는 특별한 개체예요. 어려운 이론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친구를 알아보는 당신의 평범한 하루를 천천히 풀어 쓴 이야기였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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