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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누군가 때문에 잔뜩 기분이 상한 적 있죠. 머릿속에서 그 사람과 몇 번이고 말다툼을 벌이고,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자꾸 곱씹게 돼요. 일은 손에 안 잡히고 속만 부글부글 끓고요. 영국의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도 꼭 그런 순간을 글로 남겼어요. 창밖을 멍하니 보면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와 분을 곱씹고 있었대요. 그런데 그때 황조롱이라는 작은 매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날개를 빠르게 떨면서도 공중 한 곳에 가만히 멈춰 떠 있는, 신기한 새예요. 그 모습에 빠져든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방금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던 억울함이 스르르 사라지고, 세상에 오직 그 새만 남았던 거예요. 다시 원래 고민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 일이 한결 작고 가볍게 느껴졌고요. 머독은 이 짧은 경험에서 아주 큰 생각을 길어 올렸어요.

머독은 이 경험에 '자아 비우기', 영어로 unselfing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자아를 비운다'니 어쩐지 무섭게 들리지만, 사실은 단순해요. 우리 마음에는 늘 '나'라는 렌즈가 하나 끼어 있어요. 이 렌즈는 세상을 볼 때마다 슬그머니 '이게 나한테 이득일까 손해일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로 바꿔서 보여줘요. 추운 날 따뜻한 방에 들어오면 안경에 김이 확 서리잖아요. 그러면 앞에 선 사람도, 창밖 풍경도 죄다 뿌옇게만 보이죠. 자기 생각에 푹 빠져 있을 때 우리 마음이 딱 그래요. 자아 비우기는 그 김 서린 안경을 잠깐 쓱 닦아내는 일이에요. 황조롱이에 마음을 빼앗긴 짧은 순간, 머독은 자기 자신을 잊었고, 그래서 오히려 세상을 또렷이 봤어요. 나를 잊으니 세상이 보인다는, 조금 거꾸로 된 이야기예요.

아이리스 머독은 191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1999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에요. 특이하게도 평생 두 가지 일을 나란히 했어요. 한쪽에서는 스물여섯 권이나 되는 소설을 쓴 인기 소설가였고, 다른 쪽에서는 대학에서 가르친 도덕철학자였어요. 그래서 그의 철학에는 이야기꾼의 눈썰미가 진하게 배어 있어요. 사람 마음이 얼마나 쉽게 자기중심으로 비뚤어지는지, 소설 속 인물을 수없이 빚어내며 직접 들여다봤으니까요. 머리로만 짜낸 도덕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오래 관찰한 끝에 나온 생각이라는 뜻이에요. 1970년에 펴낸 얇은 책 '선의 군림'에 이 자아 비우기 이야기가 잘 담겨 있어요.

머독이 가장 아낀 말은 '주의'예요. 그냥 흘끔 보는 게 아니라, 앞의 대상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여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이에요. 이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에게서 빌려 왔어요. 예를 들어 미운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해 봐요.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을 '나를 무시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요. 그런데 그 사람을 정말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 사람도 나름의 사정과 두려움, 서툰 마음을 가진 한 인간으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요. 머독은 이렇게 남을 제대로 보는 일 자체가 이미 착해지는 일이라고 봤어요. 흔히 착함이라고 하면 큰 결심이나 멋진 행동을 떠올리지만, 머독에게는 그 전에 '제대로 보기'가 먼저예요. 또렷이 보고 나면 좋은 행동은 그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요.

그럼 무엇을 향해 자아를 비우는 걸까요. 머독은 한가운데에 '좋음'을 두었어요. 아주 오래전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좋음을 태양에 빗댔는데, 머독도 그 비유를 무척 좋아했어요. 해를 똑바로 오래 쳐다보긴 어렵지만, 해가 떠 있어야 비로소 다른 모든 게 눈에 보이잖아요. 좋음도 그래요. 우리가 좋음 쪽으로 마음을 돌리고 '나'라는 그늘에서 한 걸음 빠져나오면, 세상과 사람이 있는 그대로 환하게 드러나요. 거창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창밖의 새 한 마리에 잠깐 마음을 빼앗기는 작고 흔한 순간에서 그게 시작된다는 게 참 머독다운 생각이에요.

아이리스 머독의 자아 비우기는, 나를 억지로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라 김 서린 안경을 잠깐 닦는 일이에요. 화가 났을 때 창밖 새 한 마리에 빠져들면 억울함이 스르르 작아지듯, '나'라는 렌즈를 잠시 내려놓을 때 우리는 세상과 사람을 훨씬 또렷이 봐요. 머독은 잘 보는 것과 착해지는 것이 사실은 같은 일이라고 말해요. 다음에 누군가 미워서 속이 끓을 때, 그 사람을 한 덩어리로 미워하는 대신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그 작은 주의 한 번이 바로 머독이 말한 자아 비우기의 첫걸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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