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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21년 로마에 도착한 스물두 살의 자리스키가 마주한 것은 세계 최고의 수학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직감이었어요.
벨라루스 코브린 출신의 아셰르 자리스키는 키예프대학에서 수학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혁명과 내전이 모든 것을 뒤흔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당시 대수기하학의 세계 수도라 불리던 이탈리아로 향했어요.
목적지는 명확했어요. 거장 카스텔누오보와 엔리케스 밑에서 배우는 것이었죠.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뭔가 이상했어요.
이 학파의 수학은 논리의 사슬이 아니라 '기하학적 감각'으로 작동하고 있었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 첫 출근을 했는데 선배들이 매뉴얼 없이 감으로 일하고 있는 걸 발견한 신입사원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수학은 증명의 학문이에요. 그런데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는 '증명 없는 정리'가 수십 년간 교과서에 실려 있었어요.
19세기 말부터 이탈리아 대수기하학파는 곡면과 고차원 도형을 직관으로 분류하며 수십 개의 정리를 쌓아올렸어요.
문제는 그 근거가 "기하학적으로 자명하다"는 말이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봐봐, 이게 맞잖아" 수준의 설명이 엄밀한 증명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특히 세베리(Federigo Severi)라는 인물이 그랬어요.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증명했다'고 주장한 결과들을 발표했는데, 나중에 그 일부가 실제로는 틀린 것으로 드러났어요.
교과서에 실린 공식을 시험에서 썼더니 채점 후 "그 공식은 특정 조건에서만 성립한다"는 피드백을 받은 것처럼, 수학마저 권위에 기대 작동할 수 있었던 거예요.
자리스키는 그걸 눈앞에서 보고 있었어요.
"이게 진짜 증명인가?"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자라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 질문을 꺼낼 수 있는 용기는 한참 뒤에야 왔어요.

카스텔누오보는 제자에게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말했어요. 자리스키는 떠난 뒤, 이탈리아 기하학 자체를 떠났어요.
1930년대에 이탈리아 파시즘이 강화되자, 유대인이었던 자리스키에게 남아있는 것은 점점 위험한 선택이 되어갔어요.
그때 스승 카스텔누오보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미국으로 가라"고요.
자리스키는 그 말을 따라 대서양을 건넜어요.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스승의 방법론을 갈아엎는 것이었어요.
당시 유럽에서는 에미 뇌터와 판데르바르덴이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것은 추상대수학, 즉 기하학의 형태가 아닌 수식과 구조로 수학을 다시 쓰는 방법이었어요.
자리스키는 이 도구를 가져와서 이탈리아 학파가 직관으로 쌓아올린 건물을 처음부터 다시 짓기 시작했어요.
존경하는 선배가 퇴사를 도와줬는데, 새 직장에서 그 선배의 프로젝트가 근본적으로 잘못 설계되었다는 보고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게 자리스키의 처지였어요.
그래서 그는 그 보고서를 썼어요.

자리스키가 이탈리아 기하학을 해체한 것은 배신이 아니었어요. 스승들이 직감으로 그려놓은 지도를, 누군가는 실측해야 했던 거예요.
하버드에 자리를 잡은 자리스키의 주변에는 차세대 수학자들이 모여들었어요.
그중 하이스케 히로나카는 훗날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받았고, 데이비드 멈퍼드도 같은 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이어받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스킴 이론'이라는 현대 대수기하학의 토대를 완성했어요. 스킴 이론은 기하학의 도형을 완전히 대수적인 언어로 번역해내는 방법이에요.
그 결과가 놀라워요.
이탈리아 학파가 "봐봐, 이건 자명해"라고 직관으로 주장했던 것들이, 자리스키와 그 후계자들의 엄밀한 언어로 비로소 제대로 증명되었어요.
부순 것처럼 보였던 제자가, 사실은 스승이 꿈꾸었던 결론을 완성한 사람이었어요.
가업을 물려받은 2세가 방식을 완전히 바꿔 사업을 성공시켰을 때, 그걸 배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어요.
자리스키의 이야기도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올바로 계승한다'는 건, 형식을 지키는 걸까요, 아니면 그 형식이 이루려 했던 것을 이루는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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