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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2011년 10월, 전 세계가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일주일 뒤 조용히 눈을 감은 남자가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잡스가 서 있던 무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잡스는 10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CNN, BBC, 전 세계 신문 1면이 그의 얼굴로 채워졌다.
그리고 10월 12일, 데니스 리치가 자택에서 혼자 눈을 감았다.
리치의 부고는 며칠 뒤, 구글 엔지니어 롭 파이크가 구글플러스에 짧게 올린 글로 처음 알려졌다.
"dmr이 떠났어." 딱 그것뿐이었다.
전 세계 뉴스는 거의 침묵했다.
멋진 레스토랑에 들어가 인테리어에 감탄하면서 정작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운 사람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잡스가 만든 아이폰, 맥, 아이패드는 모두 리치가 만든 C 언어와 유닉스(Unix)라는 운영체제 위에서 돌아간다.
건물을 지은 사람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죽음에 세계가 울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기기가 무엇이든, 그 안에는 1972년 뉴저지의 한 사무실에서 태어난 언어가 돌아가고 있다.
리치가 일한 곳은 벨 연구소였다.
AT&T가 운영한 이 연구소에서는 트랜지스터와 레이저도 탄생했다.
1972년, 리치는 이곳에서 동료 켄 톰프슨과 함께 C 언어를 만들고, 유닉스 운영체제 전체를 C로 다시 썼다.
전 세계 사람들이 매일 쓰는 언어인 영어를 한 사람이 발명했다고 상상해보라.
C는 기계에게 그런 존재다.
스마트폰, 자동차, 화성 탐사 로버, ATM까지 C 언어 또는 그 후손인 C++, Java, Python 위에서 작동한다.
1978년, 리치는 브라이언 커니핸과 함께 'The C Programming Language'라는 얇은 책을 냈다.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저자 이름 첫 글자를 따 K&R이라 불리는 이 책은, 이후 사실상 모든 프로그래밍 교재의 바이블이 됐다.
그 책의 첫 번째 예제가 바로 "hello, world"였고, 지금도 전 세계 모든 입문 교재가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

리치가 유닉스의 소스코드를 대학들에 나눠준 건 관대함이 아니라 법적 제약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족쇄가 디지털 세계의 지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1950년대, 미국 정부는 AT&T가 통신 이외의 사업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묶어 놓았다.
그래서 AT&T는 유닉스를 상업 제품으로 팔 수 없었다.
리치와 톰프슨은 그냥 대학과 연구기관에 소스코드를 거의 공짜로 나눠줬다.
요리사가 자기 비법 레시피를 동네 식당 전체에 무료로 나눠줬는데, 50년 뒤 그 레시피가 전 세계 식당의 기본 메뉴가 된 셈이다.
버클리 대학이 유닉스를 발전시켜 BSD 유닉스를 만들었고, 이것이 훗날 macOS와 iOS의 직계 조상이 됐다.
그리고 핀란드의 한 대학원생이 유닉스의 설계 철학에 영감을 받아 만든 게 바로 리눅스다.
리누스 토르발스가 만든 리눅스는 지금 안드로이드폰과 전 세계 서버의 표준이다.
만약 AT&T가 유닉스를 독점 상품으로 팔았다면, 오픈소스 혁명은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법으로 묶인 발이 오히려 날개가 됐다.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을 받은 뒤에도 리치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창문 없는 사무실, 조용한 키보드 소리, 그리고 이름이 불리지 않는 날들.
1983년, 리치는 켄 톰프슨과 함께 튜링상을 받았다.
튜링상은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다른 모든 학문 분야의 노벨상에 해당한다.
1998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미국 국가기술훈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벨 연구소를 떠나지 않았다.
강연도 거의 하지 않았고, 인터뷰도 피했다.
동료들은 그가 "복도 안쪽 창문 없는 사무실에서 조용히 코드 쓰는 걸 가장 좋아했다"고 회고한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스템을 만들어놓고도 이름이 불리지 않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퇴사하면 모든 게 멈추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2007년 벨 연구소가 축소되며 그는 은퇴했고, 혼자 지내다 2011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보도, 헤드라인도, 광장의 촛불도 없이.
오늘날 기술 업계는 가시성과 브랜딩을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리치의 삶은 그 정반대였다.
그가 만든 언어는 지금 이 순간도 수십억 개의 기계 안에서 조용히 돌아가고 있는데, 정작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말을 쓴 사람이 가장 조용하게 퇴장했다.
그게 어쩐지 그 사람답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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