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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인류의 소통 방식을 완전히 뒤집은 기계를 지킨 건 방화벽도 경비원도 아니었다.
빨간 잉크로 쓴 손글씨 한 줄이었다.
1990년 크리스마스 무렵, 스위스 제네바 외곽 CERN 물리학 연구소의 사무실 한편에 검은 정육면체 컴퓨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컴퓨터 이름은 NeXT 큐브. 그 위에는 종이 한 장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This machine is a server. DO NOT POWER IT DOWN!!" 이 기계가 세계 최초의 웹서버였다.
집에서 외장하드에 "절대 포맷 금지!!!"라고 포스트잇을 붙여본 적 있다면, 그 심정의 우주적 버전이다.
누군가 청소하다 플러그를 뽑았으면 웹의 탄생은 몇 달 늦어졌을 수도 있었다.
오늘날 수조 달러 규모 산업의 씨앗이 된 기계를 지킨 건 보안 시스템이 아니라 종이 한 장과 빨간 펜이었다.
모든 위대한 발명에는 결정적 순간의 '예스'가 있다고 믿지만, 웹의 탄생을 허락한 건 '예스'가 아니라 '글쎄'였다.
1989년 3월, 팀 버너스 리는 CERN에 문서 한 장을 제출했다.
제목은 '정보 관리: 하나의 제안'. 쉽게 말하면 "전 세계 컴퓨터가 서로 문서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상사 마이크 센달은 표지에 펜으로 한 줄을 써서 돌려보냈다.
"Vague, but exciting…" 모호하지만 흥미롭군.
공식 승인도 없었고, 예산도 없었다.
그냥 방치였다. 그런데 그 방치가 오히려 자유를 줬다.
만약 정식 승인을 받았더라면 웹은 CERN의 지적재산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금 인터넷 접속료 외에 '웹 사용료'를 따로 냈을지도 모른다.
회사에 새 아이디어를 냈는데 상사가 "일단 해봐"라고만 하고 예산은 안 준 경험.
그 방치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선물이 됐다.
웹 접속 한 번에 1원씩만 받았어도 그는 일론 머스크보다 부자였을 것이다.
그는 0원을 택했다.
1993년 4월 30일, CERN은 월드 와이드 웹 기술을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다고 선언했다.
퍼블릭 도메인이란 쉽게 말해 저작권을 포기하고 누구나 공짜로 쓸 수 있게 내놓는 것이다.
팀 버너스 리는 특허를 낼 수 있었다. 웹 접속 한 번에 단돈 1센트만 받았어도 역사상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자기가 만든 레시피가 전 세계 프랜차이즈 수백만 곳의 메뉴가 됐는데, 정작 자기는 로열티를 한 푼도 못 받는 요리사를 상상해 보라.
그 결정이 구글을, 아마존을, 유튜브를 가능하게 했다.
웹으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명단에 웹의 발명가는 없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웹을 무료로 열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성장은 없었을 거예요. 그 선택을 후회한 적 없어요."
그 말이 진심처럼 들리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자기가 만든 것을 자기 손으로 고치겠다고 나선 발명가가 있다.
그것도 70대에,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발명품을 상대로.
2009년, 팀 버너스 리는 공개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웹이 잘못된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가 무료로 세상에 내준 인프라는 어느새 감시 자본주의와 가짜뉴스의 고속도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솔리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솔리드는 "내 사진, 내 검색 기록, 내 대화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관한다"는 개념의 분산형 웹 플랫폼이다.
오늘날 우리가 유튜브를 보면 유튜브가 내 취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취향 데이터를 쥐고 필요할 때만 서비스에 빌려주는 구조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박사가 자기가 만든 괴물을 쫓아 북극까지 간 것처럼, 버너스 리는 자신의 발명품이 어디서 잘못됐는지 추적하고 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괴물을 없애려 했고, 버너스 리는 고치려 한다.
2022년 기준 그는 솔리드를 사업화한 스타트업 인럽트를 이끌고 있다.
선의로 동네에 놀이터를 지었는데 그곳이 범죄의 온상이 됐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철거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공구를 들고 직접 리모델링하겠다고 나선 70대 노인이 있다.
그가 이번에도 성공할지, 아니면 이번엔 정말 너무 늦은 건지, 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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