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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페르미는 자신이 발견하지 않은 것으로 노벨상을 받았어요.
시험지에서 정답 바로 옆에 다른 답을 적었는데 채점자가 그걸 칭찬한 셈이에요.
1934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우라늄 원자에 중성자를 쏘는 실험을 했어요.
중성자는 전기를 띠지 않아 원자핵 속으로 쑥 파고드는 입자예요.
충돌 후 우라늄이 더 무거운 새로운 원소 두 개로 변했다고 발표했고, 학계는 열광했어요.
그 공로로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됐어요.
하지만 페르미가 실제로 목격한 건 완전히 다른 현상이었어요.
우라늄 원자핵이 두 동강 나는 핵분열이었거든요.
4개월 뒤, 독일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같은 실험 데이터를 다시 분석했어요.
그제야 원자가 쪼개졌다는 해석이 나왔어요.
페르미는 노벨상 메달을 손에 쥐는 순간까지 자기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정확히 몰랐던 거예요.

시상식 다음날, 페르미 가족의 짐 가방에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옷이 들어 있지 않았어요.
1938년 12월 10일,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이 끝났어요.
다른 수상자들은 고국으로 향했지만 페르미 가족은 반대 방향을 선택했어요.
사우샘프턴을 거쳐 뉴욕으로 향하는 여객선 승선권이 이미 손에 들려 있었어요.
이유는 하나였어요.
그의 아내 라우라 카폰이 유대인이었어요.
그해 9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인종법을 공포해 유대인의 공직과 시민권을 박탈하기 시작했거든요.
노벨상 시상 여행은 그대로 망명 루트가 됐어요.
연구실, 동료, 이탈리아에 남긴 모든 것은 뒤에서 닫힌 문이 됐어요.
손에 든 건 노벨상 상금으로 환전한 외화와 트렁크 몇 개가 전부였어요.
출장이라며 비행기에 올라탄 뒤 그 나라에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조용히 결심한 순간과 비슷해요.
다만 페르미의 결심은 몇 주 전에 이미 굳어져 있었어요.

인류 최초의 원자로는 연구소가 아니라 시카고 대학 운동장 아래 스쿼시 코트에서 켜졌어요.
1942년, 미국으로 건너온 페르미는 핵폭탄 개발 비밀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핵분열 연쇄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그해 12월 2일, 시카고 대학 스태그 필드 경기장 관중석 아래 버려진 스쿼시 코트에서 Chicago Pile-1을 가동했어요.
흑연 벽돌과 우라늄을 층층이 쌓아 올린 거대한 더미였어요.
동네 체육관 지하에서 누군가 우주 발사체를 점화 시험하는 셈이었어요.
그런데 비상 정지 장치라는 게 충격적이에요.
도끼를 든 한 명이 제어봉 줄을 끊는 역할을 맡았고, 카드뮴 용액 양동이를 든 세 명이 대기했어요.
카드뮴은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반응을 즉시 멈추는 물질이에요.
그날 오후 3시 25분, 연쇄반응이 시작됐고 28분간 지속됐어요.
인류가 처음으로 핵분열의 불을 켰다가 껐어요.
워싱턴에 보낸 암호 전문은 이랬어요. "이탈리아 항해사가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핵폭발 위력을 처음 잰 것은 정밀 계측기가 아니라 페르미의 손에 든 종이 조각들이었어요.
1945년 7월 16일 새벽,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트리니티 시험이 진행됐어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에요.
폭발 직후, 페르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조각들을 공중에 흩뿌렸어요.
충격파가 밀려오면서 종이가 날아가 떨어진 거리를 눈으로 쟀어요.
그리고 곧바로 "약 10킬로톤"이라고 말했어요.
나중에 나온 정밀 계측 결과는 약 21킬로톤, 같은 자릿수였어요.
이것이 페르미 추정이에요.
정확한 데이터 없이 논리적 단계를 밟아 빠르게 근삿값을 구하는 사고방식이에요.
도시 인구를 모를 때 학교 수와 학생 수를 떠올려 5초 만에 어림잡는 것과 같은 방법이에요.
페르미는 평생 이 방법으로 살았어요.
답이 없어 보이는 질문 앞에서도 "그럼 이 정도는 알 수 있잖아요?"라고 묻고 하나씩 쌓아 올렸어요.
그리고 종이 조각이 예상보다 두 배나 멀리 날아갔을 때, 페르미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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