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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혜시가 평생 쓴 책은 다섯 수레 분량이었어요.
지금 남은 그의 글은 단 한 줄도 없어요.
고대 중국 기록인 『장자』 천하편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혜시다방 기서오거(惠施多方, 其書五車)", 풀어쓰면 "혜시의 학설은 다양하고, 그의 책은 다섯 수레 분량이다"라는 뜻이에요.
이 구절은 한국 사자성어 오거지서(五車之書), 즉 "학식이 풍부하다"는 표현의 어원이기도 해요.
혜시는 단순한 책벌레가 아니었어요.
전국시대 위(魏)나라 재상,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급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에요.
사상가이자 정치인이었죠.
그런데 그 많던 책이 전부 사라졌어요.
지금 우리가 아는 혜시의 모든 생각은, 그를 평생 비판해온 장자의 책에 조각조각 인용된 것뿐이에요.
평생 논문 30편을 쓴 교수가 죽은 뒤 모든 원고가 사라졌는데, 라이벌 교수의 논문 각주에서만 살아남은 상황과 똑같아요.
혜시는 시간, 공간, 길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부서뜨려 봤어요.
그 부서진 자리에서 동양 논리학이 시작됐어요.
『장자』 천하편에는 혜시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즉 "사물을 쪼개서 따진 열 개의 명제"가 남아 있어요.
몇 가지만 꺼내볼게요.
"한 자(尺) 길이 막대를 매일 반씩 잘라도 만대가 지나도 다 자를 수 없다."
막대를 반으로, 또 반으로, 또 반으로 나누면 영원히 0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명제는 2300년 뒤 유럽에서 미적분학이 다룬 무한 분할 문제와 정확히 같은 질문이에요.
"오늘 월나라로 떠났는데 어제 도착했다."
말장난처럼 들리죠.
그런데 친구가 이걸 우길 때 정확히 어디서 틀렸는지 반박하려면 의외로 막막해요.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혜시가 이걸로 말하고 싶었던 건,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끝", "같다", "어제"라는 단어들이 사실은 꽤 흔들리는 개념이라는 거예요.
변론용 말장난이 아니라, 개념 자체가 무너지는 지점을 찾아 두드리는 진지한 사고 실험이었어요.
동양철학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논쟁은 두 친구의 산책 중 다툼이었어요.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호량지변(濠梁之辯), 즉 "호량 다리 위에서의 논쟁"이에요.
두 사람이 호수(濠水) 위의 다리를 함께 걷고 있었어요.
장자가 물속을 내려다보며 말해요.
"저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노니, 저게 물고기의 즐거움이야."
혜시가 받아쳐요.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아?"
장자가 다시 응수해요.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걸 어떻게 알아?"
한강을 걷다가 "오리들 행복해 보인다", "네가 오리야?", "네가 나야?"로 이어지는 말장난과 구조가 똑같아요.
그런데 이게 동양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인식론 논쟁 중 하나예요.
인식론이란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를 따지는 학문이에요.
더 재미있는 건 장자가 평생 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사상가가 바로 혜시라는 점이에요.
매번 부딪히고 비판하면서도, 장자는 혜시 없이는 자기 생각을 전개하지 못했어요.
장자는 혜시의 무덤 앞에서 자기 도끼가 무뎌졌다고 했어요.
『장자』 서무귀편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장자가 혜시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제자에게 비유 하나를 꺼내요.
영(郢) 땅, 지금의 중국 호북성 어딘가에 살던 한 사람이 코끝에 파리 날개만 한 진흙을 발라두면, 장석(匠石)이라는 전설적인 장인이 도끼를 휘둘러 진흙만 정확히 베어냈어요.
진흙은 잘려나가고 코는 멀쩡했어요.
그런데 영인이 죽자, 장석은 그 뒤로 다시는 그 기예를 부리지 못했어요.
코 앞에 서서 눈 하나 깜짝 않는 상대가 없으니, 도끼를 마음껏 휘두를 수 없었던 거예요.
장자는 이 이야기를 꺼낸 뒤 말해요.
"나에게는 그 영인이 없어. 더 이상 함께 말할 상대가 없어."
혜시는 정치적으로도 불운했어요.
진나라의 외교가 장의(張儀)에게 재상 자리를 빼앗기고 위나라에서 추방당했어요.
글은 후대에 전부 사라졌고, 그를 기억하는 유일한 기록은 그를 비판한 친구의 책이에요.
매일 다투던 친구가 사라지고 나서야 장자는 깨달았어요.
그 다툼이 자기 생각의 도끼날을 갈아주던 진흙이었다는 걸.
혜시가 없는 세상에서 장자의 철학도 더 이상 날카로워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장자 덕분에 혜시를 알아요.
그런데 혜시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장자도 없었을 거예요.
그 아이러니는 지금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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