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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될 소년은 12살에 정치가 싫어 양계장 뒤편으로 도망쳤어요.
집 안에서는 매일 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아버지 제임스 로티는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였어요.
트로츠키주의란 소련 스탈린 체제에 맞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이에요.
어머니 위니프레드 라우셴부시도 사회운동가였어요.
집에는 사회주의 정치인과 지식인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거실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두고 어른들이 목소리를 높였어요.
소년 로티는 그 토론이 무서웠던 게 아니에요. 그냥 지루했어요.
대신 그는 뉴저지 시골 양계장 뒤편으로 나가 야생 난초 종을 채집하고 기록했어요.
부모님 친구들이 마르크스를 인용하는 동안, 아이는 식물 도감을 외우고 있었어요.
훗날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마지막 거인이 될 사람이 어린 시절엔 정치를 피해 꽃에 숨었다는 건, 그냥 흘려듣기엔 너무 아이러니한 사실이에요.

그가 나중에 무너뜨리려 한 분야의 정점에, 그는 이미 올라와 있었어요.
분석철학은 20세기 영미권 철학의 주류예요.
"철학도 수학처럼 논리와 언어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선 학문이에요.
그리고 로티는 그 학문의 핵심부에 있었어요.
시카고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예일대에서 박사를 받고 1961년 프린스턴 철학과에 합류했어요.
당시 프린스턴은 콰인, 데이비드슨 같은 거장이 이끄는 영미 분석철학의 본진이었어요.
콰인은 "경험과 언어의 관계를 다시 쓴" 철학자, 데이비드슨은 "의미와 행동을 언어로 연결한" 철학자로, 둘 다 20세기 철학의 판을 바꾼 인물이에요.
1967년엔 「언어적 전회」(The Linguistic Turn)라는 논문집을 편집했어요.
"언어가 철학의 핵심 문제다"라는 시대적 흐름을 집대성한 이 책은 분석철학 학계의 필독서가 됐어요.
1970년엔 종신교수 자리까지 얻었어요.
그는 배신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완벽히 마친 내부자였어요.

분석철학의 종신교수가 자기 분야를 부정하는 책을 내고, 곧 철학과 자체를 떠났어요.
1979년, 그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을 출간했어요.
제목의 "거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에요.
"인간 정신은 세계를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다"는 데카르트 이래 300년 된 철학의 전제, 바로 그게 이 책의 공격 대상이었어요.
데카르트는 17세기 프랑스 철학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남긴 근대 철학의 시작점이에요.
그가 세운 전제 위에서 300년간 철학이 쌓였는데, 로티는 그 기초부터 흔들었어요.
그는 이렇게 썼어요.
"진리란 우리 동료들이 말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진리는 바깥 세계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합의해서 만들어가는 거라는 주장이에요.
동료 분석철학자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지 않았어요.
책이 나오고 3년 뒤인 1982년, 로티는 프린스턴 철학과를 떠나 버지니아대 인문학부로 자리를 옮겼어요.
의사가 "현대 의학의 전제가 잘못됐다"는 책을 내고 의과대를 떠나 인문학부 교수가 된 것과 같은 상황이에요.
철학자가 스스로 철학과를 버린 거예요.

트럼프 당선 9년 전에 죽은 철학자가, 그 당선 18년 전에 그 장면을 정확히 적어두었어요.
1998년, 그는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를 출간했어요.
미국 좌파의 방향을 다시 묻는 이 책에서 그는 경고 하나를 남겼어요.
"학계 좌파가 추상적 이론에만 빠져 노동자 계급을 버린다면, 결국 강한 사람(strongman)이 등장해 노조와 소수자 인권 모두를 무너뜨릴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교수들이 인터넷에서 이론 논쟁을 하는 동안, 공장 노동자들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얘기예요.
로티는 2007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로부터 9년 뒤인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뉴요커」, 「가디언」, 「슬레이트」가 거의 동시에 9년 전 세상을 떠난 철학자의 18년 전 문장을 인용하기 시작했어요.
제목은 하나같이 비슷했어요. "트럼프를 예언한 철학자"라고요.
동료들이 "비현실적 상대주의자"라고 비웃었던 그가, 결국 가장 정확한 정치 예언자였어요.
하지만 로티는 자기가 옳았다는 걸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어요.
양계장 뒤편에서 난초를 채집하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는 걸, 세상이 알아챈 건 그가 떠난 한참 뒤였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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