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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롤스가 평생 안고 산 죄책감은 자기 목구멍에서 시작됐어요.
1928년, 미국 볼티모어의 한 가정에서 일곱 살 존이 디프테리아에 걸렸어요.
디프테리아는 목 안에 막이 생겨 숨이 차오르는 전염병이에요.
그런데 존이 회복되는 동안, 네 살짜리 남동생 바비가 같은 병에 걸렸어요.
바비는 살아남지 못했어요.
이듬해엔 두 살짜리 토미가 이번엔 폐렴으로 쓰러졌어요.
토미도 죽었어요.
두 번 모두 형 존에게서 병이 옮겼어요.
존 자신은 살았고, 동생 둘은 죽었어요.
훗날 학자들이 이 사건을 주목하는 건 단순히 비극이어서가 아니에요.
롤스의 가장 유명한 책 《정의론》의 핵심에 '도덕적 운(moral luck)' 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누구도 자신이 어떤 몸, 어떤 체질, 어떤 집안에 태어날지 선택하지 않았다는 생각이에요.
일곱 살 소년 존은 나쁜 균을 선택해서 품은 게 아니에요.
그냥 그 몸으로 태어났을 뿐이에요.
그 선택하지 못한 몸이 동생 둘을 데려갔어요.

롤스의 학부 졸업논문은 철학이 아니라 사실상 신학이었어요.
1943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는 스물두 살 청년 롤스가 제출한 논문 제목은 〈죄와 신앙의 의미에 관한 짧은 탐구〉였어요.
신학교 입학 논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제목이에요.
실제로 롤스는 졸업 후 성공회 사제가 되는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 계통의 기독교 종파로, 사제가 되려면 신학교에서 수년을 공부해야 해요.
롤스는 신 앞에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신앙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묻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논문을 제출한 해, 입대 통지서가 왔어요.
20세기에 가장 세속적인 정의 이론을, 그러니까 신 없이도 정의를 설명하는 이론을 쓰게 될 사람이, 그 전날 밤까지 신학 논문을 쓰고 있었던 거예요.

사제가 되려던 청년은 일본의 잿더미 위에서 자기 신을 묻었어요.
1943년 입대한 롤스는 태평양 전선, 뉴기니와 필리핀 전투에서 보병으로 싸웠어요.
그리고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직후 점령군의 일원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갔어요.
롤스가 본 것은 폐허였어요.
검게 탄 건물 터와 부서진 거리들, 그리고 그 사이를 걸어다니는 민간인들이에요.
그 자리에서 군 종군 목사의 설교가 들려왔어요.
설교의 내용이 문제였어요.
무고한 일본 민간인의 죽음을 신의 뜻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이었거든요.
롤스는 훗날 자신의 회고 〈나의 종교에 관하여(On My Religion)〉에서 그 순간을 돌아봐요.
그건 평생 믿어온 신앙의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어요.
평생 따르던 신이,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에 동원되고 있었어요.
사제가 되려던 청년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끊어졌어요.
그리고 신이 빠진 자리에 다른 질문이 들어섰어요.
신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정의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앞으로 20년을 먹고 자라났어요.

《정의론》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어요. "누구도 자기 운을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다."
1950년대 초 하버드 대학교 강단에 선 롤스는 이 생각을 이론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약 20년을 강의하고 고치고 또 고쳤어요.
그 20년의 결과가 1971년에 출간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에요.
이 책의 가장 유명한 장치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이에요.
한국어로 풀면 '모름의 커튼' 정도인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바로 이해돼요.
회사 채용 규칙을 만드는데, 본인이 지원자로 태어날지 면접관으로 태어날지 모른 채로 규칙을 짜야 한다면, 어떤 조항부터 바꾸겠어요?
대부분 불공정한 항목을 지울 거예요.
어느 쪽에 서게 될지 모르니까요.
롤스는 바로 그 가상의 출발선에서 사회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고 했어요.
자신이 어떤 재능, 어떤 재산, 어떤 인종으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룰을 만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정한 쪽을 선택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출발선이 바로 '무지의 베일'이에요.
학자들은 이 아이디어의 뿌리를 롤스의 삶에서 찾아요.
일곱 살 소년이 선택하지 않은 몸으로 동생을 잃은 기억, 전쟁터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민간인들의 얼굴이에요.
누구도 자기 운을 골라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이론의 뼈대가 됐어요.
한 가지 더 알면 이 책이 더 이상하게 느껴져요.
롤스는 평생 심한 말더듬으로 공개 강연을 꺼렸고, 인터뷰와 헌정 논문집과 각종 영예를 대부분 거절했어요.
그런 사람이 20세기에 가장 많이 인용된 정치철학서를 남겼어요.
두 동생을 먼저 보낸 볼티모어의 소년이 쓴 책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법 이론과 헌법 논쟁 한가운데 있어요.
그 소년은 자기 죄책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던 걸까요, 아니면 그저 어딘가에 놓아두고 싶었던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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