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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2016년 11월 9일, 이미 세상을 떠난 철학자의 18년 된 책 한 페이지가 전 세계 SNS를 도배했어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다음 날이었어요.
사람들이 공유한 페이지는 1998년에 출간된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의 한 대목이었어요.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어요.
"백인 비숙련 노동자들이 정치 시스템이 자기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판단하면, 그들은 강자(strongman)가 등장해주길 기다리기 시작할 거예요."
18년 전 일기장에 "올해 회사가 망할 거야"라고 정확히 적혀 있던 걸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책을 쓴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2007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어요.
그는 2016년 선거를 보지 못했지만, 그 선거를 가장 정확하게 예언한 사람이 됐어요.
12살 로티의 집 거실에는 스탈린에게 쫓기던 사람들이 드나들었어요.
그의 부모 제임스 로티와 위니프레드 라우셴부쉬는 1930년대 미국 공산당과 결별한 반스탈린 좌파 지식인이었어요.
소련식 공산주의는 틀렸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노동자와 약자 편에 서고 싶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집에는 특별한 손님이 드나들었어요.
존 프랭크라는 사람이었는데, 1940년 멕시코에서 스탈린의 자객에게 암살된 트로츠키의 비서였어요.
또래 아이들이 야구카드를 모으던 그 나이에, 로티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기다 죽은 사람의 동료가 자기 식탁에서 밥을 먹는 풍경을 보며 자랐어요.
로티는 나중에 "12살에 이미 트로츠키 전집을 읽었다"고 회고했어요.
이 집은 지식인들이 현실 정치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공간이었어요.
결국 그 공기를 마시며 자란 소년은 훗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장 먼저 경고하는 철학자가 됩니다.
1979년 프린스턴 철학과의 간판 교수가, 자기 학과 전체를 무너뜨리는 책을 출간했어요.
책 이름은 『철학과 자연의 거울(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이었어요.
'분석철학'은 수학처럼 엄밀하게 논리로 언어를 해부해서 진리에 도달하려는 20세기 철학의 주류였어요.
그런데 로티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이었어요.
"철학은 인간의 마음이 세계를 정확히 비추는 거울이라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어요. 하지만 그 거울이 처음부터 없었어요."
한국 최고 검사가 "형법 자체가 잘못 설계됐다"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를 낸 것처럼, 그건 자기 밥그릇을 스스로 깨는 행위였어요.
분석철학계 최정상의 인물이, 가장 정교한 분석철학의 도구를 써서 분석철학의 토대를 박살냈어요.
철학계는 크게 흔들렸어요.
로티는 이 한 권으로 스타 교수에서 배신자이자 이단아로 불리기 시작했어요.
미국 최고 철학자의 마지막 명함에는 '철학과'가 아니라 '비교문학과'가 찍혀 있었어요.
1982년 프린스턴 철학과를 떠난 로티는 버지니아 대학 인문학부로 옮겼고, 1998년에는 다시 스탠퍼드 비교문학과로 자리를 옮겼어요.
의대 교수가 "환자에게 진짜 필요한 건 의학이 아니라 좋은 소설"이라며 국문과로 이직한 것과 같은 이야기예요.
그는 철학을 배신한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철학을 너무 깊이 사랑했기에 그 결론에 도달했어요.
"철학자는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더 나은 비유를 만드는 시인이어야 해요."
그래서 1998년, 비교문학 교수 로티가 바로 그 해에 쓴 책이 『미국 만들기』예요.
18년 뒤 세상을 뒤흔든 그 예언은,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이야기의 언어로 쓰였어요.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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