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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그가 32살에 쓴 편지는 유서였지만, 부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편지를 읽을 수 있다.
1802년 가을, 베토벤은 빈 북쪽 외곽의 작은 휴양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나는 6년 전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고 있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작곡가에게 청력 상실은, 화가에게 시력 상실과 같다.
직업에 필요한 바로 그 감각이 사라지고 있는데, 베토벤은 6년간 혼자 버텼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귀머거리라고 알려지는 순간, 음악가로서 끝나는 거잖아."
그는 편지에서 죽음을 결심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 편지를 봉투에 넣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고, 25년 뒤 그가 죽은 후에야 발견됐다.

귀가 들리지 않는 작곡가는 머릿속에서만 연주되는 음악을 적어 내려갔다.
유서를 쓴 1802년 이후, 베토벤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부터 그가 쓴 곡들을 보면 입이 벌어진다.
영웅 교향곡(3번), 5번 교향곡, 6번 전원 교향곡, 황제 협주곡.
우리가 "베토벤" 하면 떠올리는 대표작들이 전부 유서 이후에 나왔다.
청력은 계속 나빠졌다.
1818년 무렵에는 거의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됐고, 사람들과는 대화 노트로 소통했다.
대화 노트란, 공책에 글씨를 써서 주고받는 필담이다. 오늘날로 치면 종이 채팅이다.
그리고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피아노에 나무 막대를 물고, 이빨로 피아노 몸통의 진동을 느끼며 작곡했다는 것.
소리가 아닌 진동으로 음악을 만든 거다.

곡이 끝났는데 베토벤은 계속 악보를 보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9번 교향곡 '합창'이 처음 무대에 올랐다.
베토벤은 무대 옆에 서서 박자를 짚고 있었지만, 실제 지휘는 다른 사람이 했다.
청력이 없는 그에게 오케스트라를 실시간으로 이끄는 일은 이미 불가능했다.
마지막 음이 울리고 수천 명의 청중이 일어섰다.
하지만 베토벤은 몰랐다.
그는 여전히 악보를 향해 서 있었다.
그때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청중 쪽으로 돌려세웠다.
베토벤은 그제야 눈으로 봤다. 기립하고, 모자를 흔들고, 손수건을 허공에 날리는 수천 명을.
청중은 박수를 다섯 번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오스트리아 황실 가족에 대한 예의가 세 번이었으니, 다섯 번은 당시 법규상 규정을 넘어선 숫자였다.
그는 인생 최대의 갈채를, 보기만 하고 듣지 못했다.

베토벤이 죽었다는 소식에 빈 시민 2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그가 32살에 죽기로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풍경이었다.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56세로 사망했다.
사흘 뒤 장례식이 열렸고, 당시 빈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다.
시민 15명 중 한 명이 거리로 나온 셈이다.
학교는 그날 하루 휴교했고, 군인들이 인파를 통제했다.
관을 든 사람 중에는 작곡가 슈베르트도 있었다.
슈베르트는 이듬해 31세로 요절했고, 유언대로 베토벤 옆에 묻혔다.
그리고 그날, 베토벤의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하나가 나왔다.
25년 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쓴 유서였다.
죽기로 결심했던 32살의 사내는, 그 결심 이후 25년을 더 살았다.
그 25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들을 썼고,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그것들을 들려줬다.
유서를 부치지 않은 이유를, 베토벤 본인도 편지에 적었다.
"예술만이 나를 붙잡아 두었어.
내가 이 소명을 다 이루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거든."
그렇다면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의 소명은 무엇인가?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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