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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56년, 네덜란드의 한 천문학자가 학술지에 알파벳이 뒤섞인 한 줄을 보냈어요.
그게 토성 고리 발견의 첫 발표였어요.
내용이 아니라 흔적을 먼저 남기는 방식이에요.
당시 17세기 유럽에서는 "내가 먼저 발견했다"는 우선권 다툼이 정말 치열했거든요.
그래서 내용을 숨기면서 날짜만 등록하는 아나그램 기법이 학계 관행으로 쓰였어요.
아나그램이란 라틴어 문장의 알파벳을 무작위로 섞어놓은 암호예요.
읽어봤자 의미 없는 문자열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원문을 공개하면 "이 날짜에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어요.
요즘으로 치면 비트코인 가격 예측을 미리 해시값으로 트윗해두고, 나중에 원문을 공개해서 "내가 먼저 맞혔어"를 증명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에요.
3년 뒤인 1659년, 호이겐스는 자신의 책 Systema Saturnium(토성의 체계)을 출간하면서 드디어 해독본을 공개해요.
"토성은 얇고 평평한 고리에 둘러싸여 있다."
과학자가 자기 발견을 일부러 못 읽게 발표하고 3년을 기다린 거예요.

호이겐스는 자기 시계가 대양 한가운데서 멈출 줄 몰랐어요.
정확함의 비결이 곧 약점이었거든요.
1656년, 호이겐스는 진자시계를 발명해요.
진자가 한 번 흔들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항상 일정하다는 원리를 이용한 거예요.
당시로선 인류가 만든 가장 정밀한 시계였어요.
그런데 그 시절 항해사들에게는 해결 못한 절박한 문제가 있었어요.
바다 위에서 자기 위치의 동서 거리, 즉 경도를 알 수가 없었던 거예요.
경도를 알려면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는데, 항해 중에 시간이 조금씩 어긋나면 배가 수백 킬로미터씩 엉뚱한 곳으로 가버렸어요.
호이겐스는 자기 진자시계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배에 시계를 직접 실어 대서양으로 보냈어요.
결과는 실패였어요.
배가 흔들릴 때마다 진자가 불규칙하게 움직였고, 기온이 오르내리면서 진자 막대의 길이가 달라졌어요.
평지에서 가장 빠른 자전거가 자갈길에서는 가장 먼저 넘어지는 셈이에요.
진자시계의 정밀함은 중력이 일정한 환경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였거든요.
1673년, 호이겐스는 Horologium Oscillatorium(진자 시계론)을 펴내며 진자 운동의 수학 법칙을 정리해요.
하지만 항해용 시계의 꿈은 그 이전에 이미 접어야 했어요.
가장 정확한 시계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그 정확함의 원리였으니까요.

호이겐스가 빛은 파동이라 적은 그 순간, 그 책은 한 세기 동안 묻힐 운명이었어요.
옆 서가에 뉴턴이 있었거든요.
1690년, 호이겐스는 Traité de la Lumière(빛에 관한 논고)를 출간해요.
빛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동이라는 주장이에요.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사방으로 번지는 것처럼, 빛도 그렇게 움직인다고요.
그런데 동시대에 아이작 뉴턴이 있었어요.
뉴턴은 빛이 아주 작은 입자들의 흐름이라고 주장했고, 당시 유럽 과학계에서 절대적인 권위자였어요.
결국 학계는 뉴턴의 입자설을 정설로 받아들였고, 호이겐스의 파동설은 구석으로 밀려났어요.
회의에서 신입 사원이 정답을 냈는데 임원이 다른 답을 내자 모두가 임원 쪽을 따른 상황과 정확히 같아요.
그렇게 110년이 흘렀어요.
1801년, 토머스 영이 이중슬릿 실험을 해요.
빛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하면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만든다는 걸 보여준 실험이에요.
그제야 호이겐스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어요.
옳은 사람이 더 유명한 사람에 가려 100년 넘게 잊힌 거예요.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연구자들이 뉴턴의 그늘에서 파동설을 포기했을지는 알 수 없어요.

호이겐스의 마지막 원고는 토성도 빛도 아니었어요.
다른 별의 사람들이 어떤 손을 가졌을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1695년, 호이겐스는 죽음이 가까워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책을 완성해요.
제목은 Cosmotheoros, 라틴어로 '천체 관찰자'라는 뜻이에요.
호이겐스 사후인 1698년, 그의 형이 출간했어요.
책에서 그는 다른 행성에도 식물이 있을 것이고, 동물이 있을 것이며, 손과 지능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요.
뜬구름 잡는 공상이 아니라 당시 천문학 관측 결과를 근거로 삼은 진지한 추론이에요.
17세기 정통 과학자가 이런 책을 쓴다는 게 당시에도 파격이었어요.
오늘날 SETI, 즉 우주 어딘가에 있을 지적 생명체를 탐사하는 연구자들이 지금도 하는 질문을 300년 전에 라틴어로 먼저 적어둔 셈이에요.
암호로 숨긴 발견, 바다에서 멈춘 시계, 100년 뒤에야 증명된 이론을 거쳐 마지막에 도달한 게 외계인 이야기였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 어딘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호이겐스가 그 첫 줄을 쓴 지 300년이 지났어요.
그들이 호이겐스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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