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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왕의 얼굴을 그려야 할 화원이, 기생과 양반이 담장 뒤에서 나누는 눈빛을 그렸어요.
혜원 신윤복은 할아버지, 아버지 신한평까지 3대가 도화서 화원이었어요.
도화서는 왕의 초상, 국가 행사 기록, 외교 선물용 그림을 전담하는 왕실 소속 그림 관청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공식 예술가 집단이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신윤복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공식 기록은 없지만 정설로 전해지는 이유는 하나예요.
양반가의 사적인 장면, 기생과의 밀회, 뒷골목의 민망한 순간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거예요.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가 익명으로 셀럽 가십 계정을 운영하다가 정체가 들킨 상황이에요.
직함은 더없이 엄숙한데, 하는 짓은 정반대였던 거죠.

그는 화폭 귀퉁이에 글까지 남겼어요.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안다"고.
혜원의 대표작 월하정인(月下情人)에는 담벼락 모퉁이에서 초롱을 든 선비와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마주 서 있어요.
쓰개치마는 조선 여인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던 천으로, 이 그림에서 여인은 그걸 살짝 내려 선비와 눈을 맞추고 있어요.
그리고 화폭 위쪽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달은 기울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아네."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지 모르면 그냥 예쁜 옛날 그림이에요.
조선 회화의 주류는 산수(산과 강 풍경)나 인물 독상, 즉 한 명을 공식 기록하는 그림이었어요.
연애 중인 남녀를 한 화면에 포착하는 전통이 아예 없었거든요.
한국에 드라마라는 장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처음으로 멜로 한 편을 찍어버린 것과 같아요.
혜원 이전에는 아무도 이 장면을 그릴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누구인지 지금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 그림을 보물로 지정했어요.
혜원의 미인도(美人圖)는 치마 주름, 옥색 저고리, 노리개 매듭까지 세밀하게 담은 여성 전신 초상화예요.
2018년 보물 제1973호가 됐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어디에도 기록이 없어요.
조선시대 여성 전신 초상화는 왕비나 열녀처럼 공식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그릴 수 있었어요.
이름도 신분도 모르는 여인을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건 당시 규범 밖이었어요.
길 가는 행인을 찍은 무명 스냅 사진 한 장이 200년 뒤 루브르 영구 소장품이 되는 일이에요.
혜원은 기록될 이유가 없던 얼굴을 기록해 버렸고, 그 선택이 옳았어요.

단원이 대장간 망치 소리를 그릴 때, 혜원은 기방 담장 너머의 숨소리를 그렸어요.
단원 김홍도는 신윤복과 거의 같은 시대, 같은 도화서 출신이에요.
단원은 대장간, 씨름, 서당, 논일 같은 서민의 땀 냄새 나는 노동을 그렸어요.
혜원은 기방, 뱃놀이, 단오날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 양반의 뒷모습을 그렸어요.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의 결말이에요.
단원풍속도첩은 국보 제527호, 혜원전신첩은 국보 제135호로, 국가는 두 화첩을 모두 국보로 지정했어요.
같은 관청 출신 두 천재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기록했고, 국가는 두 세계를 모두 '지켜야 할 것'으로 판정한 거예요.
같은 스튜디오 소속 두 감독 중 한 명은 공장 다큐를, 다른 한 명은 심야 멜로를 찍었는데 훗날 두 작품이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된 셈이에요.
그렇다면 혜원이 파직을 감수하면서 그린 금기의 장면들은 결국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세계가, 200년 뒤 가장 생생하게 살아남은 기록이 됐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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