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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대학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 한 남자의 강의를 듣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파리로 걸어왔어요.
1100년대 초, 파리 노트르담 성당 옆 학교에 피에르 아벨라르라는 강사가 있었어요.
그의 강의를 거쳐 간 학생들 중에 훗날 교황 3명과 추기경 20명이 나왔다고 전해져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요?
스승을 공개 토론에서 무너뜨렸거든요.
당시 최고 권위의 논리학자였던 기욤 드 샹포가 그 상대예요.
기욤은 "보편자는 실재한다"는 이론의 대가였어요.
쉽게 말하면 '의자'라는 개념 자체가 개별 의자보다 더 진짜라는 주장이에요.
아벨라르는 그 논리에 구멍을 냈고, 결국 스승의 자리를 빼앗아버렸어요.
오늘로 치면 수백만 구독자 강사가 라이브 방송에서 지도교수를 논리로 이기고 수강생을 전부 데려간 상황이에요.
그러니 파리로 사람이 몰릴 수밖에요.
12세기판 인플루언서가 탄생한 거예요.

결혼을 거부한 쪽은 중세 여성이었어요.
엘로이즈는 당시 기준으로 경이로운 사람이에요.
17세였는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모두 읽을 줄 알았거든요.
오늘날도 세 고전 언어를 동시에 하는 사람은 드문데, 그것도 1100년대 여성이요.
그녀의 삼촌 퓔베르는 노트르담 성당 운영을 맡은 고위 성직자였어요.
조카를 더 잘 교육시키고 싶었던 그는 당대 최고 논리학자 아벨라르를 가정교사로 집에 들였어요.
결과는 예측 가능했죠.
두 사람은 연인이 됐고, 아들을 낳았어요.
아이 이름은 아스트롤라비우스예요.
천문 관측 기구 '아스트롤라베'에서 딴 이름인데, 철학자 부모답기도 하고 너무하기도 해요.
사태가 불거지자 아벨라르가 비밀 결혼을 제안했어요.
그런데 거부한 건 엘로이즈였어요.
"철학자는 결혼하면 안 돼. 가정에 묶이는 순간 철학은 끝나거든."
이건 단순한 거절이 아니에요.
당시 여성이 결혼을 거부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보다 그의 철학적 자유를 먼저 생각했어요.

그를 침묵시키려 한 폭력이, 그를 저술가로 만들었어요.
1117년 무렵 어느 밤이었어요.
삼촌 퓔베르가 고용한 사내들이 아벨라르의 방에 침입했어요.
그들은 그를 거세했어요.
유럽 최고의 논리학자가, 논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방식으로 무너진 거예요.
파리 전체가 충격에 빠졌어요.
가해자들은 붙잡혀 거세에다 눈까지 뽑히는 형벌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벨라르에게 돌아온 건 없었어요.
그는 수치심에 파리 북쪽의 생드니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됐어요.
엘로이즈도 그의 요청으로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의 베네딕트회 수녀원에 들어갔어요.
두 사람은 각자 담장 안에 갇혔어요.
그런데 바로 이 시점부터 아벨라르의 저술이 시작돼요.
그를 조용히 만들려 했던 폭력이, 오히려 그에게 펜을 쥐여준 셈이에요.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편지를 썼어요.
수도원장이 된 아벨라르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글로 남겼어요.
제목은 "나의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예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자서전인데,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내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들어봐"예요.
그런데 이 글이 엘로이즈의 손에 들어갔어요.
그녀가 먼저 편지를 보냈고, 서신 교환이 시작됐어요.
수도원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말 대신 글로 다시 만난 거예요.
아벨라르는 이 시기에 중요한 철학 작업도 했어요.
"의도가 죄를 결정한다"는 윤리 이론이 그중 하나예요.
어떤 행동이 죄인지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할 때의 마음이 결정한다는 생각이에요.
또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Sic et Non)"라는 신학서를 썼어요.
교회 교부들의 서로 모순된 발언을 나란히 늘어놓고 '직접 판단해보세요'라고 한 책이에요.
교회가 모든 답을 독점하던 시대에 '의심하고 탐구하라'고 말한 거예요.
결국 1140년,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가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어요.
당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수도자이자 교회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에요.
교회 재판 끝에 아벨라르의 주장은 공식 이단으로 단죄됐고, 2년 뒤인 1142년 그는 세상을 떠났어요.
엘로이즈는 그로부터 20년을 더 살았어요.
그리고 죽어서야 같은 무덤에 묻혔어요.
두 사람의 유해는 지금 파리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합장돼 있는데, 오늘도 그 무덤에는 파리에서 가장 많은 꽃이 쌓여요.
몸은 갈라졌지만 글은 남았어요.
헤어진 두 사람이 평생 편지로만 대화한 기록이 신학 논문보다 유명해졌고, 900년이 지나도록 파리에서 가장 많은 꽃이 쌓이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두 사람도 알았을까요, 자신들의 편지가 이렇게 오래갈 줄.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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