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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조선에서 학자가 된다는 건 가문, 스승, 서울 세 가지가 필요했어요.
기정진에게는 셋 다 없었어요.
심지어 한쪽 눈도 없었어요.
179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기정진은 여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았어요.
그 뒤 왼쪽 눈을 영영 잃었어요.
하지만 조선의 학문 세계에서 이것보다 더 치명적인 결함이 따로 있었어요.
조선의 학문은 철저한 연줄 게임이었어요.
안동이나 서울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이름난 스승 밑에서 배워야 주류 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어요.
전라도 시골의 독학자에게 그 문은 처음부터 닫혀 있었어요.
그런데 기정진은 정식 스승 없이 혼자 책을 읽었어요.
그 끝에 1831년 향시에서 장원을 했어요.
향시는 지방에서 치르는 예비 과거 시험인데, 장원이 수석 합격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입시학원 한 번 안 다닌 시골 학생이 수능 전국 수석을 한 격이에요.
1835년에는 사마시(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는 소과 시험)에서 또 장원을 했어요.
전라도 시골, 외눈, 독학, 무명 가문을 안고 조선 최고 시험 두 개를 연속으로 1등 한 사람이에요.

81세 노인이 붓을 들었어요.
제목부터 '외필(猥筆)', 뜻을 풀면 '주제넘은 붓'이에요.
그런데 내용은 조선 학문의 두 산맥을 동시에 뒤흔드는 것이었어요.
조선 성리학에는 200년 묵은 논쟁이 있었어요.
사람의 감정과 도덕을 만드는 게 '이(理)'냐, '기(氣)'냐는 싸움이에요.
이(理)는 우주의 근본 원리, 기(氣)는 그 원리가 실제로 작동하는 물질적 힘이에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이 문제로 갈라졌어요.
그 제자들이 200년간 논쟁을 이어왔어요.
기정진은 1878년 외필에서 그 논쟁의 전제 자체를 건드렸어요.
그의 주장은 이랬어요.
"이(理)가 능동적 주체예요. 기(氣)는 그것의 표현일 뿐이에요."
퇴계와 율곡 모두 '이와 기가 함께 작동한다'는 전제 위에서 싸웠는데, 기정진은 그 전제 자체를 부정한 거예요.
오늘날로 치면, 200년간 뉴턴 역학 교과서를 두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싸우던 학자들 앞에 시골 선생이 나타나 "이 교과서의 기본 전제가 틀렸어요"라고 말한 것과 같아요.
유배도 없었고, 처벌도 없었어요.
그냥 시골 노인의 붓 한 번이 200년 논쟁의 판을 바꿔버렸어요.

왕은 그를 일곱 번 불렀어요.
기정진은 일곱 번 사양 상소를 썼어요.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들어오자, 부르지도 않은 상소를 올렸어요.
1862년 임술민란이 터졌어요.
전국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사건이에요.
수습이 필요했던 조정은 기정진에게 잇따라 관직을 제의했어요.
사간원 정언(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언관직), 현감(고을 수령), 호조참판(오늘날로 치면 기획재정부 차관급)까지 제의했어요.
하지만 기정진은 모두 거절했어요.
사양 상소를 직접 써서 보낼 만큼 단호하게요.
그런데 1866년 병인양요가 터졌어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에요.
기정진은 이때 흥선대원군에게 직접 '병인소(丙寅疏)'를 올렸어요.
"서양과 타협해서는 안 돼요. 단호히 거절해야 해요."
부르지 않아도, 관직이 없어도, 할 말은 했어요.
대기업 임원 자리는 평생 거절하면서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가장 신랄한 비판문을 쓰는 외부 전문가 같은 사람이에요.

기정진은 평생 칼을 든 적이 없어요.
그러나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제자들은 1896년 일본군에게 총을 겨눴어요.
사상이 무기가 되기까지 30년이 걸렸어요.
1879년 82세로 사망한 기정진의 학맥을 노사학파라고 해요.
노사(蘆沙)는 그의 호로, 그가 머물던 전남 장성의 풍경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손자 기우만, 제자 기삼연·정재규·이최선 등이 이 학맥을 이어받았어요.
이들은 1896년과 1907년, 호남 의병의 핵심 지도부가 됐어요.
기삼연은 호남창의회맹소(호남 지역 의병들이 연합해 꾸린 항일 조직) 대장으로 일본군과 직접 싸웠어요.
결국 1908년 광주에서 붙잡혀 처형됐어요.
어떤 교수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30년 뒤 전부 무장 독립운동가가 된 것과 같아요.
기정진의 "이(理)가 주체"라는 논리는, 제자들에게 "원칙 앞에서는 물러서지 말라"는 정신적 기둥이 됐어요.
시골 노인의 붓이 무장 항일의 씨앗이 됐어요.
그렇다면 한 가지가 궁금해져요.
기정진이 왕의 부름에 응해 서울로 올라갔다면, 장성에 그의 학파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 제자들이 1896년 의병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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