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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케임브리지 최고의 수학 천재가 법정에서 14년을 보냈다. 수학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서.
아서 케일리는 1842년 케임브리지 수학 우등 졸업시험에서 전체 1등을 차지했다. 이 시험 출신 졸업생들을 '랭글러'라고 부르는데, 그 중 1등이 시니어 랭글러다. 당시 영국에서 시니어 랭글러는 오늘날 국제수학올림피아드 금메달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명예였다.
그런데 이 영광에 돌아온 현실적 보상이 수학 교수직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는 순수수학만 연구하는 교수직이 거의 없었다. 케일리는 법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변호사로 일한 14년 동안, 케일리가 발표한 수학 논문은 200편이 넘는다. 법원 서류 사이 틈새에서 수학이 자랐다.
케일리가 씨름한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숫자 하나끼리는 곱할 수 있다. 그러면 숫자 여러 개를 표 형태로 묶어놓은 것끼리도 곱할 수 있을까? 그 표가 바로 행렬이다. 숫자들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해서, 표 전체를 하나의 수처럼 다루는 것.
1858년 케일리는 「행렬 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오늘날 공학, 물리학, 머신러닝까지 쓰이는 행렬 대수학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변호사로 일하던 중에 완성했다.

급여가 절반 수준으로 줄었는데도 케일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86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새로 만든 순수수학 교수직을 케일리에게 제안했다. 당시 성공한 변호사의 수입에 비해 교수직 급여는 훨씬 낮았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한다는 건 오늘날 대기업 임원이 연구소 월급으로 이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드문 선택이었다.
하지만 케일리에게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법정에서 보낸 14년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수학이 없으면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법복을 벗고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케일리가 생애 동안 남긴 수학 논문은 966편이다. 한 달에 한 편씩 쓴다고 해도 80년이 넘게 걸리는 분량이다.
그것도 14년은 변호사로 일하면서 쓴 것들이다. 의뢰인을 만나고 법원 서류를 처리하고, 남은 시간에 수학을 했다. 수학이 직업이 됐을 때도, 직업이 수학이 아니었을 때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케일리가 만든 행렬은 지금 스마트폰 카메라의 이미지 처리 알고리즘 안에 있다. AI가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도, 검색 엔진이 결과를 정렬하는 방식도 행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법원 서류 더미 옆 종이 위에 쓰인 숫자 표였다는 게 케일리 이야기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솔직한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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