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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하버마스는 말을 할 수 없는 아이였어요.
태어날 때부터 입천장이 갈라져 있었거든요.
이걸 구개파열이라고 해요. 입과 코가 이어진 채로 태어나는 것인데, 발음이 뭉개지고 말할수록 이상하게 들려요.
그런 아이가 나치 독일에서 자랐어요.
열 살이 되면 당연히 히틀러 유겐트에 들어갔죠.
히틀러 유겐트는 독일 청소년을 의무적으로 묶어놓던 나치 청소년 단체로, 애국심과 복종을 주입하는 곳이었어요.
전쟁이 끝난 건 그가 열여섯 살 때였어요.
라디오에서 뉘른베르크 재판 중계가 흘러나왔는데, 뉘른베르크 재판은 나치 전범들을 국제 사회가 심판하는 자리였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아우슈비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때 이전의 모든 것이 무너졌어요." 그가 나중에 한 말이에요.
내가 배운 것, 내가 속했던 조직, 내가 옳다고 믿었던 세상이 한꺼번에 붕괴한 거예요.
말하기 힘들었던 소년은 그 순간 이후, 평생의 질문을 찾았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귀족과 상인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정치를 토론했거든요.
원래 유럽 사회에서 신분은 곧 발언권이었어요.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살았죠.
하지만 카페에서는 커피 한 잔을 사면 누구나 앉을 수 있었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어요.
하버마스는 이것을 연구해서 1962년 책으로 펴냈어요.
제목이 『공론장의 구조변동』이에요.
공론장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탄생했는데, 쉽게 말하면 국가도 아니고 개인의 집도 아닌, 시민들이 모여 공개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공간이에요.
그의 주장은 간단했어요. 민주주의는 투표함이 아니라 카페에서 시작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비판하고, 설득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실체라는 것이죠.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공론장이 망가졌어요. 신문은 광고주 눈치를 봤고, 텔레비전은 시민이 대화하는 공간이 아니라 기업과 국가가 메시지를 뿌리는 채널이 됐거든요.
"시민은 이제 논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하버마스의 말이에요.
민주주의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내용이 비어간다는 경고였죠.

1980년대, 철학계에 거센 바람이 불었어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사조였는데, 핵심 주장이 이거였어요. "이성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은 결국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 주장을 이끌었어요.
그들이 보기에 "합리적 토론"이라는 것도 결국 누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느냐의 문제였죠.
이성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어요.
하버마스는 정면으로 반박했어요.
그의 반격 무기가 의사소통 이성이라는 개념이었는데, 1981년 출판한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서 제시했어요.
핵심 아이디어는 이래요. 상대방을 속이거나 조종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대화할 때, 그 대화 안에는 이미 이성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말이 되는 이유를 대야 해요. "왜냐하면 제가 더 힘이 세거든요"는 설득이 아니잖아요.
설득하려는 순간, 이미 이성의 규칙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죠.
"이성을 포기하면 비판 자체를 포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가진 것 중 제일 나은 도구를 버리는 짓이잖아요." 하버마스가 한 말이에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이성은 권력의 도구"라고 공격할 때, 하버마스는 되물었어요. 그 공격 자체가 이성적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냐고.
이성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결국 이성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2022년, 아흔세 살의 하버마스가 글을 발표했어요.
주제는 소셜미디어였는데, 진단이 날카로웠어요. SNS는 공론장을 파괴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파괴하는 방식이 예전 텔레비전과는 달라요.
텔레비전은 모든 시청자에게 같은 것을 보여줬어요. 적어도 같은 현실 위에서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었죠.
그런데 알고리즘은 사람마다 다른 세계를 보여줘요. 내가 동의하는 것만 피드에 뜨고, 그러면 토론이 아니라 확인만 남아요.
18세기 카페에서 귀족과 상인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장면, 기억하시죠.
그게 공론장의 출발이었어요.
하지만 SNS는 귀족은 귀족끼리, 상인은 상인끼리 각자의 카페로 보내버려요. 서로 다른 현실에 살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져요.
하버마스는 이것을 "탈중심화된 의사소통의 함정"이라고 불렀어요.
누구나 말할 수 있게 됐지만,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상태.
말이 가장 많아진 시대에 진짜 대화가 가장 적어졌다는 역설이에요.
말하기 힘들었던 소년이 평생 대화의 조건을 연구했어요.
그리고 아흔이 넘어서도 멈추지 않고 물었어요.
지금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하고 있는 것, 그게 진짜 대화인지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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