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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피론이 철학자가 된 건 책상 앞에서가 아니라,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인도 땅을 가로지르면서였어요.
기원전 330년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원정을 나섰을 때 피론은 그 대열에 끼어 있었어요.
그는 전사가 아닌 철학자였지만, 그 길 끝에서 그리스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김노소피스타이,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현자들"이라 불린 인도의 수행자들이었어요.
옷도 재산도 없이 사는 사람들인데, 오늘날로 치면 숲속에 들어가 명상만 하는 스님과 비슷해요.
이들이 가르친 건 딱 하나였어요. "세상 일에 판단을 내리는 걸 멈추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피론은 이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그리스 철학은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이 수행자들은 달랐어요.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멈추라는 거였어요.
원정이 끝나고 고향 엘리스로 돌아온 피론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
그는 그리스 철학계에 이 질문 하나를 던졌어요.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요?"

피론은 서양 회의주의의 창시자로 꼽히는데, 정작 그 자신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
오늘날 우리가 피론에 대해 아는 거의 모든 것은 그의 제자 티몬이 남긴 풍자시 덕분이에요.
티몬은 피론을 거의 신처럼 묘사했지만, 피론 자신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피론이 가르친 건 뭐였을까요?
핵심은 그리스어로 에포케예요.
한국어로 하면 "판단 보류", 쉽게 말하면 "이게 맞다" "저게 틀리다"를 선언하지 않는 거예요.
꿀을 예로 들게요.
꿀은 달아요. 그런데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써요.
그럼 꿀은 달까요, 쓸까요?
피론은 "꿀은 달다"라고 단정하는 대신 "내 혀에는 달게 느껴진다"고만 말하자고 했어요.
그 판단을 내리지 않는 순간, 묘한 일이 생겨요.
마음이 고요해지는 거예요.
그 고요함을 피론은 아타락시아라고 불렀어요.
폭풍 없는 바다처럼 평온한 상태. 그게 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라고 봤어요.

판단을 보류하라고 가르쳤던 피론이 개 한 마리에게 도망쳤어요.
제자들이 웃으며 물었어요.
"선생님, 방금 개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신 건 아닌가요?"
피론은 솔직하게 인정했어요. "인간의 몸을 완전히 벗어던지기란 쉽지 않소."
이 일화가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피론의 철학은 현실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었거든요.
개가 달려오면 도망가야 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해요.
그가 판단을 보류하라고 한 건 일상의 본능이 아니라, "이것이 절대 진리다"라는 철학적 선언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폭풍우 치는 배 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선원들이 공포에 떨 때, 피론은 배 한 구석에서 태평하게 밥을 먹고 있는 돼지 한 마리를 가리켰어요.
"저 돼지처럼 흔들리지 마세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끌려다닐 필요는 없잖아요."
피론이 추구한 건 무감각이 아니었어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었어요.

아무것도 안 쓴 사람의 이름이 2300년 뒤에도 철학 교과서에 실려 있어요.
피론이 살던 시절, 그의 고향 엘리스는 그를 도시의 고위 사제로 임명했어요.
거리를 걸으면 시민들이 고개를 숙였다는 기록도 있어요.
단 한 줄도 쓰지 않은 사람이 그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됐어요.
그가 죽고 500년쯤 지나,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라는 철학자가 피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어요.
그 책이 "피론주의 개요"인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어요.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이 책을 읽고 "내가 아는 게 뭐가 있지?"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기 시작했어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흄은 피론의 회의주의를 현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어요.
정작 피론 자신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됐어요.
90년 가까이 살다 간 피론은 무언가를 주장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냥 흔들리지 않는 채로 살았어요.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솔직함이 "이게 맞다"는 확신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걸, 그는 삶으로 보여줬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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