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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20년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훗날 나치에 협력할 철학자와 훗날 일본 감옥에서 죽을 철학자가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1922년, 미키 기요시는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마르틴 하이데거—아직 『존재와 시간』을 출판하기 전, 유럽 철학계에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젊은 교수였습니다.
미키는 그 초기 강의를 직접 들은 극소수의 아시아 유학생이었습니다.
하이데거 밑에서, 그리고 신칸트주의 철학자 리케르트 밑에서 수학한 뒤 귀국한 그는, 교토학파—니시다 기타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 고유의 철학 전통—의 차세대 기대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그가 선택한 것은 교수직이 아니었습니다.
해외 명문대에서 유럽 철학의 최전선을 경험하고 온 엘리트 지성인이, 정부가 감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뛰어든 것입니다.
가장 순수한 학문을 배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상을 선택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사상범에게 총리의 자문 그룹이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것이 관용이었을까요, 이용이었을까요.
1930년, 미키는 공산당 자금 지원 혐의로 체포·투옥되어 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세 차례 총리를 역임한 일본 귀족 정치인—의 자문 정책 집단인 쇼와연구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감옥에 간 사람이, 출소 후 군국주의 정부의 정책 브레인이 된 것입니다.
미키가 구상한 것은 '협동주의'였습니다.
제국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아시아 각국이 대등하게 협력하는 제3의 길.
그는 그것을 '동아협동체론'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론은 현실 속에서 다른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일본 제국이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슬로건—의 지적 외피로 기능했습니다.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사람이 다시 그 회사 전략기획실에 앉아 있는 상황처럼, 내부에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미키 기요시는 상상력이 역사를 만든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1945년, 역사는 그에게 상상도 못 할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쓰인 그의 대표작 『구상력의 논리』—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이 역사와 현실을 만들어간다는 독창적인 철학 체계—는 교토학파 내부에서도 가장 야심찬 기획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서양의 '로고스(이성)'와 동양의 '파토스(감성)'를 결합하려는 시도였고, 스승 니시다의 철학을 넘어서려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격화되면서 쇼와연구회는 해산되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어디에도 착지하지 못한 채 표류했습니다.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고 강의한 철학자가, 정작 자신이 놓인 현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천황의 항복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도요타마 형무소의 미키 기요시는 그 방송을 들었을 수도 있고,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해 3월, 미키는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도피 중이던 반체제 인사 다카쿠라 테루를 자택에 숨겨준 혐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가던 시점이었고, 그가 한 일은 친구를 재워준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감옥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문을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9월 26일, 미키 기요시는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사망했습니다.
옴에 의한 피부병과 영양실조였습니다.
향년 마흔여덟.
시험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는데, 한 사람만 시험장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일본 지식인 사회에 충격이 퍼졌고, 이 사건은 전후 일본의 인권·사법 개혁 논의에 불을 붙인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이데거 앞에 앉았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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