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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마야(māyā)는 우리가 보는 세상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지는 이 세계가 궁극의 실재는 아니라는 뜻이에요. 비베카난다에게 진짜 바탕은 하나인 브라만(梵)이고, 눈앞의 물질세계는 그 위에 잠시 어른거리는 모습이에요.
밤에 방 안에서 벽에 걸린 옷을 보고 "어, 사람인가?" 하고 놀란 적 있나요?
불을 켜면 그냥 옷이에요.
옷은 진짜 거기 있었지만, 우리가 본 "사람"은 진짜가 아니었죠.
마야(māyā)는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비베카난다가 서양에 전한 베단타 철학에서 마야는 "세상은 가짜다"라는 무시무시한 선언이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담담한 관찰에 가까워요.
우리 눈앞의 세계는 분명히 보이고 만져지지만, 한순간도 가만있지 않고 변하고 늙고 사라져요.
그렇게 계속 바뀌는 것을 "끝까지 변하지 않는 진짜"라고 부르긴 어렵죠.
그래서 이 세계를 궁극의 실재가 아니라, 그 위에 어른거리는 모습으로 본 거예요.
바닷물을 떠올려 볼게요.
파도는 계속 생겼다 사라지지만, 파도를 이루는 물은 늘 바다 그대로예요.
파도 하나하나는 잠깐 나타난 모양이고, 진짜 바탕은 바다죠.
마야가 말하려는 것도 비슷해요.
산과 사람과 도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바뀌는 모양이고, 그 모든 것 밑에 흐르는 하나의 바탕이 있다는 거예요.
비베카난다는 그 바탕을 브라만(梵), 곧 우주의 정신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 마야는 세계를 "없는 것"으로 지우지 않아요.
파도가 진짜로 출렁이듯 세계도 진짜로 우리 앞에 펼쳐져요.
다만 파도를 바다 전체로 착각하면 안 되듯, 변하는 세계를 "이게 전부이고 끝까지 진짜"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옷을 사람으로 오해한 그 순간에 머무는 셈이에요.
마야는 바로 그 착각의 베일을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비베카난다(1863년~1902년, 자료에 따라 1862년생으로도 적혀요)는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난 수도자예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서 "미국의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첫마디로 큰 박수를 받으며, 인도의 베단타 철학을 서양에 처음으로 널리 소개한 사람이죠.
그가 마야를 자주 이야기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서양 청중은 흔히 눈앞의 세계를 신이 만든 완결된 무대라고 여겼는데, 비베카난다는 그 무대 뒤에 하나의 바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는 시카고 연설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발원한 강물이 결국 바다에서 만나듯 사람들이 걷는 여러 길이 굽었든 곧든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고 인용했어요.
겉모습(마야)은 달라도 바탕은 하나라는 이야기를, 이 강물 비유가 그대로 담고 있는 셈이죠.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짚어 볼게요.
"세계가 궁극의 실재가 아니라면, 다 부질없으니 손 놓고 도망가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에요.
비베카난다의 마야는 정반대예요.
중국어 자료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현실의 물질세계를 브라만(梵)에 이르는 하나의 계단으로 봤어요.
계단은 목적지가 아니지만, 그 계단을 밟지 않고는 위로 올라갈 수 없죠.
| 흔한 오해 | 마야가 실제로 말하는 것 |
|---|---|
| 세계는 가짜라 아예 없다 | 세계는 진짜 보이지만 끝까지 변하지 않는 실재는 아니다 |
| 부질없으니 도망가면 된다 | 세계는 브라만에 이르는 계단이니 성실히 밟고 오른다 |
| 변하는 것이 전부다 | 변하는 것 밑에 하나의 바탕(브라만)이 있다 |
즉 마야를 안다는 것은 세상을 미워하거나 버리는 게 아니라, 변하는 것에 너무 매달려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 세상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태도예요.
파도가 바다인 줄 알면 오히려 파도 위에서 더 자유로워지듯이요.
마야(māyā)는 "세상은 거짓말"이라는 냉소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하는 파도일 뿐 궁극의 바다는 아니라는 담담한 지적이에요.
비베카난다는 그 바다를 브라만(梵)이라 부르며, 물질세계를 그 바탕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봤어요.
그러니 마야를 기억한다는 것은 세상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변하는 것에 덜 휘둘리며 그 안에서 더 단단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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