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세(勢)는 세상일이 쌓여 만들어지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되돌리기 어려운 흐름의 방향이에요. 왕부지는 옳음(理)이 이 흐름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흐름이 나아가는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봤어요. 그래서 역사를 옛날로 되돌리려는 생각을 비판했지요.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려 본 적 있나요?
처음에는 손으로 방향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어요.
그런데 눈덩이가 커지고 비탈을 구르기 시작하면, 이제는 나 혼자 힘으로 멈추거나 되돌리기가 어려워요.
이미 굴러가는 '방향'이 생겨 버린 거예요.
왕부지(1619년~1692년)가 말한 세(勢)가 바로 이거예요.
세는 원래 '기세, 힘의 흐름'이라는 뜻의 한자예요.
우리가 "분위기가 이미 그쪽으로 기울었어"라고 말할 때 그 기울어짐, 세상일이 차곡차곡 쌓여서 생기는 흐름의 방향을 가리켜요.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세상일에도 저절로 그렇게 되어 가는 방향이 있다는 거죠.
왕부지는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들어서던 격변기를 살면서, 산속에 숨어 100여 종 400여 권의 책을 쓴 사람이에요.
나라가 통째로 뒤집히는 큰 흐름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이라, '흐름'을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어요.
왕부지의 핵심 생각은 '이세합일(理勢合一)'이라는 말에 담겨 있어요.
리(理)와 세(勢)가 하나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리는 '마땅함, 옳은 이치'를 말해요.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쉬워요.
옳은 이치는 하늘 위 어딘가에 정답처럼 딱 정해져 있고, 실제 세상은 그 정답에 못 미쳐 헤맨다고요.
왕부지는 이 생각에 고개를 저었어요.
옳음이 흐름 바깥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일이 흘러가는 바로 그 안에서 마땅함이 드러난다고 봤거든요.
다시 물로 비유해 볼게요.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세'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흐르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그럴 만한 까닭(理)'이 이미 들어 있어요.
흐름을 빼고 이치만 따로 손에 쥘 수도 없고, 이치 없이 흐름만 덩그러니 있지도 않아요.
둘은 앞뒤로 나뉘지 않고 붙어 있어요.
왕부지가 리와 기(氣)를 두고 "리가 앞서고 기가 뒤서는 것이 아니다(理不先而气不后)"라고 한 말과도 결이 같아요.
그래서 그는 세상을 볼 때,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굴러가는 일들 속에서 옳음을 찾으려 했어요.
이세합일에서 아주 중요한 결론이 하나 나와요.
바로 '옛날이 무조건 좋았으니 그때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비판한 거예요.
왕부지는 역사가 멈췄다 나아갔다를 되풀이하지만, 근본 방향은 위로 올라간다고 봤어요.
굴러 내려오며 커진 눈덩이를 손으로 밀어 산꼭대기로 되돌릴 수 없듯이, 이미 나아간 흐름을 억지로 옛날로 되감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옛 황금시대로 돌아가자'는 복고론도, '역사는 그저 똑같이 돌고 돈다'는 순환론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재미있는 건, 왕부지 자신은 무너진 명나라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는 점이에요.
실제로 절에서 100명 남짓을 모아 청나라에 맞서 싸우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고,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붓을 들었어요.
되돌릴 수 없는 흐름 앞에서, 감정으로는 옛 나라를 그리워하면서도 머리로는 냉정하게 '흐름은 앞으로 간다'는 이치를 붙잡은 거예요.
그는 "내 책은 200년 후에야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吾書兩百年後始顯)"라는 말을 남겼는데, 정말로 그의 책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널리 읽혔어요.
그러면 "흐름과 옳음이 하나"라는 말은 "힘센 쪽, 이긴 쪽이 늘 옳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조심해야 해요.
왕부지는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가 말한 세는 권력자 한 사람이 휘두르는 힘이 아니라, 수많은 백성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큰 흐름이에요.
그래서 그는 오히려 "천하를 태평케 하는 것은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일 뿐(平天下者,均天下而已)"이라며, 정부는 힘센 자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진짜 흐름은 몇몇 강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나온다는 거죠.
오늘 우리가 '대세를 읽는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유행이나 힘을 무작정 따르라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안에 담긴 마땅함이 무엇인지 함께 살피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요.
세(勢)는 세상일이 쌓여 생기는, 되돌리기 어려운 흐름의 방향이에요.
왕부지는 '이세합일'이라 하여 옳은 이치(理)가 이 흐름 밖에 따로 있지 않고 흐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봤어요.
그래서 역사를 옛날로 되감으려는 복고론과 제자리에서 돈다는 순환론을 함께 비판했고, 역사의 큰 방향은 위로 나아간다고 보았어요.
다만 그 흐름은 힘센 자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백성의 삶이 만든다는 점,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왕부지의 세를 붙잡은 거예요.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