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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니르구나(nirguna)는 산스크리트어로 '속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카비르는 신을 특정한 모습·이름·조각상에 가둘 수 없는, 형상 없는 하나의 절대로 보았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형상 속에서만 신을 찾으려 하면 정작 그 신을 놓친다고 여겼죠.
와이파이 신호는 눈에 안 보이지만 방 안 어디에나 흐르고 있죠.
카비르가 노래한 신도 그래요.
카비르는 15세기 인도 바라나시에서 활동한 박티 시인이자 사상가예요.
이슬람교도 방직공 부부에게 길러졌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평생 부른 신이 바로 니르구나(nirguna), 곧 '속성 없는 신'이었어요.
산스크리트어에서 '구나(guna)'는 성질·속성·모양을 뜻하고, 앞에 붙은 '니르(nir)'는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니르구나는 눈으로 그릴 수 있는 얼굴도, 손으로 만질 몸도, 딱 하나로 정해진 이름도 없는 신을 가리켜요.
바람처럼, 신호처럼, 분명히 있지만 어떤 틀에도 담기지 않는 신이죠.
카비르 사상의 뿌리에는 이 '형상 없는 하나'가 자리 잡고 있어요.
카비르는 비슈누파 성자 라마난다(Ramananda)의 제자였다고 전해져요.
라마난다는 신이 모든 존재 안에 깃들어 있다고 가르친 인물이에요.
그런데 신이 나무에도, 강물에도, 옆집 아이 안에도 있다면 어떨까요?
그 신을 어느 한 조각상 안에만, 어느 한 사원 안에만 가둘 수 있을까요?
없어요.
어디에나 있는 것은 어느 한 모습에 묶이지 않으니까요.
20세기 프랑스 학자 샬럿 보드빌(Charlotte Vaudeville)은 카비르가 추구한 것이 '절대(the Absolute)'이며, 이 절대가 곧 니르구나이고, 우파니샤드의 브라만-아트만 개념과 같다고 봤어요.
데이비드 로렌젠 같은 학자는 이 니르구나 브라만 개념을 인도 불이론(Advaita, '둘이 아님') 베단타를 세운 아디 샹카라에게서 온 것으로 봐요.
쉽게 말하면 '나와 신이 결국 둘이 아니다'라는 오래된 생각이 카비르의 형상 없는 신 뒤에 흐르고 있는 거예요.
신을 떠올리는 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 볼 수 있어요.
하나는 정해진 모습을 가진 신을 조각상이나 그림으로 모시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모습에도 매이지 않는 니르구나예요.
카비르는 뒤쪽에 섰죠.
| 형상 있는 신 | 형상 없는 신(니르구나) |
|---|---|
| 정해진 얼굴·이름이 있음 | 얼굴도 이름도 하나로 못 박지 않음 |
| 조각상·그림 앞에서 예배 | 어떤 형상 안에도 가둘 수 없음 |
| 눈에 보이는 곳에서 찾음 | 마음 안, 모든 곳에서 만남 |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점이 있어요.
형상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크고 온전해서 어느 조각으로도 다 담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컵으로 바다를 다 뜰 수 없듯이요.
카비르 사상에서 삶은 두 원리가 만나는 이야기예요.
하나는 내 안의 개별 영혼 지바트마(Jivatma)이고, 다른 하나는 신 파라마트마(Paramatma)예요.
구원, 곧 해탈은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라고 봤어요.
형상 없는 신이기에 이 만남이 가능해요.
신이 저 멀리 조각상 안에만 있다면 나는 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신세겠죠.
하지만 신이 형상 없이 어디에나, 그러니까 내 마음 안에도 흐른다면, 나는 그 신과 이어질 수 있어요.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바다가 되듯, 작은 나의 영혼이 큰 절대와 다시 하나가 되는 그림이에요.
카비르가 형상을 지운 자리에는 이렇게 '나와 신의 만남'이라는 더 가까운 신앙이 들어섰어요.
니르구나는 '속성이 없다'는 말이고, 카비르에게 신은 얼굴도 이름도 조각상도 없는 형상 없는 하나였어요.
스승 라마난다의 '신은 모든 존재 안에 있다'는 가르침과 불이론의 흐름이 그 바탕이었죠.
형상이 없다는 건 텅 비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틀로도 다 담기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내 안의 영혼(지바트마)이 신(파라마트마)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보았어요.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에서 찾지 않고 마음 안에서 만나려 한 태도, 그게 카비르가 남긴 형상 없는 신의 핵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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