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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큰 질문의 답을 인간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본 회의론과, 그러니 덧없는 지금 이 순간의 소박한 즐거움을 미루지 말자는 태도가 하나로 묶인 생각이에요. 답 없는 물음을 붙들고 괴로워하느니, 확실한 오늘을 살자는 쪽이지요.
오마르 하이얌은 3차 방정식을 도형으로 풀어낸 11세기 페르시아 수학자예요.
그런데 그의 이름을 900년 가까이 남긴 건 정교한 계산이 아니라, 짧은 4행시에 담겼다는 삶의 태도였어요.
바로 '쾌락적 회의론'이지요.
이 말은 두 조각으로 되어 있어요.
앞의 '회의론'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신의 뜻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여기 있을까" 같은 아주 큰 질문에 인간은 확실한 답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뒤의 '쾌락'은 "그러니 지금 손에 쥔 이 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하니, 소박한 기쁨을 뒤로 미루지 말자"는 태도예요.
두 생각을 붙이면 이렇게 돼요.
답 없는 물음으로 오늘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을 살자.
일상으로 옮겨 볼게요.
시험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밤, 아무리 뒤척여도 점수는 바뀌지 않아요.
그럴 때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눈앞의 따뜻한 밥을 맛있게 먹고 푹 자는 거예요.
하이얌의 태도가 딱 이래요.
바꿀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 앞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거지요.
재미있는 건, 이 태도가 대충 사는 사람의 변명이 아니라 누구보다 정밀했던 학자에게서 나왔다는 점이에요.
하이얌은 1년의 길이를 365.24219858156일로 계산했는데, 이는 오늘날 값과 견주어도 놀랄 만큼 정확해요.
그가 이끈 팀이 만든 잘랄리력은 5000년에 하루 오차로, 훗날 유럽의 그레고리력보다도 정확했지요.
하늘을 이렇게까지 정밀하게 잰 사람이라면, 반대로 인간의 자로는 결코 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예요.
별의 움직임은 소수점 아래까지 계산해도, 죽음 뒤의 일이나 세상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는 어떤 식으로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하이얌의 시를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이런 정서가 겹겹이 드러나요.
세상은 덧없고(염세), 큰 답은 알 수 없으며(불가지론),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으니(운명론), 지금의 조용한 즐거움에 만족하자(에피쿠로스적 태도)는 것이지요.
'쾌락'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쉬워요.
하지만 여기서 쾌락은 밤새 흥청거리며 방탕하게 놀자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처럼, 지나친 욕심을 덜고 지금의 소박한 것에서 만족을 찾는 쪽에 가까워요.
| 흔한 오해 | 실제 결 |
|---|---|
|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 바꿀 수 없는 것과 화해하는 담담함 |
| 밤새 방탕하게 놀자 | 눈앞의 소박한 기쁨을 소중히 여기자 |
|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 알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한 뒤의 선택 |
그러니까 쾌락적 회의론은 "몰라서 포기했다"가 아니라 "모른다는 걸 인정했더니, 확실한 오늘이 더 또렷해졌다"에 가까워요.
걱정으로 채울 수도 있는 하루를, 차 한 잔과 좋은 사람과의 대화로 채우자는 거지요.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게 있어요.
이 태도를 담았다는 4행시들이 정말 하이얌이 쓴 게 맞느냐는 문제예요.
그의 것으로 전해지는 시는 1000편이 넘지만, 학자들은 실제 그의 작품이 200편도 안 될 거라 봐요.
어떤 학자(한스 하인리히 셰이더)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며 "페르시아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까지 했어요.
해석도 팽팽하게 갈려요.
시를 글자 그대로 읽어 그를 유물론자이자 회의주의자로 보는 쪽(사데크 헤다야트 등)이 있는가 하면, 취함을 신에 대한 사랑의 비유로 읽어 수피 신비주의 시로 보는 쪽도 있어요.
이란 학자들(포루기 등)은 이 수피 해석을 거부했고요.
게다가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이미지의 상당 부분은 19세기 영국 번역가 피츠제럴드의 자유로운 의역에서 온 것이라, 하이얌 본인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어요.
정리하면 '쾌락적 회의론'은 하이얌이란 이름에 붙은 하나의 강력한 해석이지, 그가 도장을 찍어 남긴 확정된 사상은 아니에요.
쾌락적 회의론은 두 문장으로 요약돼요.
인간은 큰 질문의 답을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니 확실한 지금의 소박한 기쁨을 미루지 말자.
이건 대충 살자는 변명이 아니라, 알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한 뒤의 담담한 선택에 가까웠어요.
다만 이 생각을 담았다는 시들의 진짜 저자가 하이얌인지, 또 그를 회의주의자로 볼지 신비주의자로 볼지는 지금도 학자마다 의견이 갈려요.
그러니 이 태도는 하이얌의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그의 이름 위에서 오래 사랑받아 온 하나의 물음으로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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