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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태허즉기(太虛即氣)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텅 빈 공간, 곧 태허(太虛)가 사실은 기(氣)가 옅게 흩어져 있는 상태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세상에 진짜 '없음'은 없고, 기가 모이면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다시 태허로 돌아갈 뿐이에요.
방 안을 한번 둘러보세요. 책상과 컵 사이의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보이죠. 그런데 그 빈 곳에도 공기가 가득 차 있어요.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에요. 북송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1020년~1077년, 호는 횡거)가 말한 태허즉기도 딱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요.
장재는 이렇게 적었어요. "太虛無形,氣之本體(태허무형, 기지본체)." 풀면 "태허는 형체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기의 본체다"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태허는 '크게 텅 빈 것', 다시 말해 눈에 아무것도 안 잡히는 광활한 하늘 같은 상태예요. 장재는 그 텅 빈 상태가 진짜 '없음'이 아니라, 기가 아주 옅게 흩어져 있는 모습이라고 봤어요. 즉 태허 = 흩어진 기, 이것이 태허즉기의 핵심이에요.
장재가 이 말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가 살던 시대에는 두 가지 큰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어요. 하나는 노자의 "유생어무(有生於無)", 곧 "있는 것은 없음에서 생겨난다"는 말이었어요. 또 하나는 불교의 공(空) 사상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은 텅 빈 것이고 마음이 지어낸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었어요.
장재는 이 둘을 모두 반대했어요. 젊은 시절 불교와 도가 책을 몇 년간 파고들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유가 경전으로 돌아온 사람이었거든요. 그가 보기에 세상은 마음속 환상이 아니라 우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실재하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무(無)에서 유(有)가 나온다"는 말도 틀렸다고 봤어요. 진짜 아무것도 없는 상태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 하나가 옅어졌다 짙어졌다 할 뿐이라는 거예요. 세상은 '없음'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늘 있어 온 기가 모습을 바꾼 결과라는 뜻이지요.
태허즉기를 가장 쉽게 느끼려면 물을 떠올리면 돼요. 냄비의 물을 끓이면 김이 되어 공중으로 사라지죠. 하지만 물이 없어진 게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수증기로 흩어진 것뿐이에요. 온도가 내려가면 다시 물방울로 맺히고요.
장재의 기도 똑같이 움직여요. 기가 모이면(聚) 사람과 나무와 돌 같은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散) 다시 태허로 돌아가요. 그래서 그는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사물의 소멸이 아니라 형태 변화일 뿐이라고 했어요. 죽음도 이 틀 안에서는 '없어짐'이 아니에요. 잠깐 모여 있던 기가 다시 넓은 태허로 풀려 흩어지는 것이지요.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이 김이 되어도 그 재료는 그대로이듯,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져 무(無)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장재는 대립조차 끝내 화해로 풀린다고 봤어요. "仇必和而解(구필화이해)", 곧 "대립하는 것은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 풀린다"는 말이에요. 모이고 흩어짐이 한 기의 두 얼굴이니, 세상의 갈라짐도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믿음이지요.
성리학이라 하면 흔히 '이치(理)'를 가장 근본에 두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어요. 정호·정이 형제와 주희로 이어지는 정주이학(程朱理學)이 그렇지요. 그런데 장재는 방향이 조금 달랐어요. 그는 기(氣)를 도(道)의 근원으로 보아, 이(理)보다 기를 앞세웠어요. 이 차이를 표로 보면 이래요.
| 구분 | 장재의 태허즉기 | 정주이학 |
|---|---|---|
| 가장 근본 | 기(氣) | 이(理) |
| 텅 빈 태허 | 흩어진 기, 실재함 | '태허'라는 말 자체를 문제 삼음 |
| 세상의 재료 | 모였다 흩어지는 하나의 기 | 이치가 기를 통해 드러남 |
그래서 장재를 흔히 '기일원론(氣一元論)', 곧 세상을 오직 기 하나로 설명한 사람이라고 불러요. 다만 이 이름표를 너무 단순하게 붙이면 안 돼요. 그의 태허 개념이 노자의 '무' 생각이나 옛 의학서 주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학계에서 제기돼요. 뿌리가 한 갈래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재미있게도 태허즉기는 성리학 안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였어요. 정호·정이와 주희는 장재의 다른 글은 크게 칭찬했지만, 이 태허즉기설만큼은 비판했어요. '태허'라는 말을 쓴 것 자체가 불교나 도가 냄새를 풍긴다고 못마땅해했거든요.
반대로 명대의 한방기(韓邦奇)와 왕정상(王廷相) 같은 학자들은 오히려 태허즉기설이 정주이학보다 낫다고 옹호했어요. 한쪽은 '위험한 생각'이라 하고 다른 쪽은 '더 뛰어난 생각'이라 한 셈이지요. 같은 학설을 두고 평가가 이렇게 갈렸다는 것은, 장재가 던진 물음이 그만큼 근본적이었다는 뜻이에요. 세상의 밑바탕은 '이치'인가 '기'인가, 텅 빔은 '없음'인가 '흩어진 있음'인가. 이 질문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곱씹게 되지요.
태허즉기는 어려운 말 같지만 뼈대는 간단해요. 첫째, 텅 빈 태허는 진짜 '없음'이 아니라 기가 옅게 흩어진 상태예요. 둘째, 기가 모이면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태허로 돌아가니, 죽음도 사라짐이 아니라 형태가 바뀌는 것이에요. 셋째, 장재는 이 생각으로 노자의 '없음에서 생긴다'와 불교의 '공'을 함께 반대했고, 이(理)보다 기(氣)를 앞세워 정주이학과 다른 길을 냈어요. 방 안의 빈 공간에도 공기가 가득하듯,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없음'은 없다는 것. 이 한 줄만 기억하면 태허즉기의 절반은 손에 쥔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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