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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본원진심(本源眞心)은 사람마다 본래 지니고 있는 참마음이에요. 텅 비어 고요하지만 늘 또렷이 아는 성질을 켜 놓고 있어서, 종밀은 이 마음이 곧 부처의 성품(불성)이라고 봤어요.
당나라 승려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년부터 841년까지)은 화엄과 선을 함께 공부하며 여러 가르침을 하나로 꿰려 한 사람이에요.
그 통합의 바닥에 깔아 둔 개념이 바로 '본원진심(本源眞心)', 곧 '근원이 되는 참마음'이에요.
말을 풀어 볼게요.
'본원'은 뿌리, '진심'은 참된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화가 났다가 기뻤다가 하는 표면의 마음 말고, 그 모든 마음이 거기서 피어나는 바탕 자리를 가리켜요.
파도가 아무리 요란해도 그 아래 바닷물은 늘 그대로 있는 것처럼요.
종밀은 이 바닷물 같은 자리가 누구에게나 이미 있다고 봤어요.
경전을 파는 사람과 좌선하는 사람이 서로 다투는 걸 안타까워했던 그는, 양쪽이 결국 같은 마음을 말하고 있다는 걸 보이려면 그 '같은 마음'이 무엇인지부터 못 박아야 했어요.
그 못이 바로 본원진심이에요.
종밀은 이 참마음의 성질을 '공적지(空寂知)'라는 세 글자에 눌러 담았어요.
空(공)은 텅 빔, 寂(적)은 고요함, 知(지)는 앎이에요.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는 방을 떠올려 볼까요.
방은 비어 있고(공) 조용해요(적).
그런데 그 안에 '지금 방이 비어 있고 조용하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그 앎은 텅 비어 있지 않죠.
종밀이 말하고 싶은 게 이거예요.
참마음은 모양도 색도 없어서 텅 비고 고요하지만, 깜깜한 돌멩이처럼 죽어 있는 게 아니라 '항상 또렷이 아는' 성질을 늘 켜 놓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밀은 이 앎을 곧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마음바탕(心地)과 같은 것이라고 했어요.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가리키는 자리는 하나라는 뜻이에요.
'텅 빔'과 '앎'을 따로 떼지 않고 한 덩어리로 붙잡은 것, 이게 본원진심의 심장이에요.
아니에요.
종밀에게 본원진심은 수행을 아주 잘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상(賞)이 아니에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모두에게 켜져 있는 등불 같은 거예요.
다만 우리가 그걸 모르고 살 뿐이죠.
그래서 종밀은 공부의 순서를 이렇게 봤어요.
먼저 '아, 내 안에 이런 참마음이 본래 있었구나' 하고 한 번 알아채고, 그다음 오래 쌓인 습관을 천천히 지워 가며 그 마음을 온전히 살려 내는 거예요.
앞엣것을 단박에 깨침(돈오), 뒤엣것을 차차 닦음(점수)이라고 불렀어요.
등불이 원래 있었다는 걸 아는 일과, 등불을 가린 먼지를 닦아 내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니까요.
그는 깨침의 체험 없이 무작정 닦기만 하는 건 참된 수행이 아니라고까지 말했어요.
종밀은 같은 시대의 다른 선(禪) 문파들이 이 참마음을 반쪽만 봤다고 아쉬워했어요.
정리하면 이래요.
| 입장 | 마음을 보는 방식 | 종밀의 지적 |
|---|---|---|
| 북종 계열 | 더러운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둘로 나눔 | 본래 하나인 참마음을 쪼갰다 |
| 우두종 계열 | '마음이 없다(無心)'는 텅 빔만 강조 | 텅 빈 속에서도 늘 아는 성질을 놓쳤다 |
| 종밀(본원진심) | 텅 비고 고요하되 늘 아는 한 마음 | 공(空)과 지(知)를 함께 봐야 한다 |
우두종을 두고 종밀은 이런 비유를 들었어요.
병 속이 비었다고 해서 병 자체가 없는 건 아니라고요.
텅 빔이 곧 '아무것도 없음'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참마음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그 안에 늘 깨어 아는 힘을 품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붙잡은 자리가 바로 본원진심이에요.
본원진심을 세 마디로 붙잡아 볼게요.
첫째, 그것은 마음의 표면이 아니라 모든 마음이 피어나는 바탕 자리예요.
둘째, 그 바탕은 텅 비고 고요하지만 항상 또렷이 아는 성질(공적지)을 켜 놓고 있어서, 종밀은 이를 불성이라 불렀어요.
셋째, 이 마음은 누구에게나 본래 있으니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가려진 먼지를 닦아 되찾는 것이에요.
파도 아래 바닷물처럼, 그 자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조용히 깨어 있다고 종밀은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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